인간의 타산적이고 비열한 본질적 습성을 적나라하게 해부했다.
그래서 신선하지만 역으로 삶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 서글프다.
마크 롤랜즈는 '희망이란 인간 실존의 중고차 판매원이다.
너무나도 친절하고 그럴듯하지만 결코 신뢰할 수 없다.' 고 절망한다.
And so what? 그래서 어쩌라구?
인생의 좀더 밝은 면은 없을까?
부정의 희망이 아닌 긍정의 희망,
계산으로 때묻지 않은 그런 청정하고 해맑은 희망.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초부터 희망은 詐欺를 내포하고 있다.
아니 잠깐!
그게 사기일까?
롤랜즈는 그걸 사기라고 단정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삶의 역동(Drive), 생을 이어가게 하는 에너지라고 표현한다.
유아기때부터 우린 그렇게 자랐다.
인류역사를 진화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희망이다.
진화를 통해 인간을 다른 모든 것들로 부터 구분하게 한 것이 바로 이 희망이다.
그것이 행복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조금 다른 영역이다.
생존이 있어야 철학도 있는 것이다.
롤란즈의 생각도 결국 그가 그토록 미워하는 그 잘난 이성에서 나온거다.
그래서 우리는 때묻지 않은 아이들에게 대대손손 온갖 거짓말로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존감이 되어 사바세계의 아픔을 만들어내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해탈한다.
그게 인생이다.
우리 모두가 불쌍한 시지프스다.
그런 우리가 불행한가?
시지프스가 정말 불행한가?
격렬하고 고통스런 운동 뒤에 시지프스가
산 꼭대기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컵의 맛은 어떨까?
마크 롤랜즈는 철학자와 늑대에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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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는 세상을 도구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성향이 있다. 영장류에게 있어 가치는 효용에 따라 결정된다. 영장류는 삶을 확률을 따져 계산한 후 그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성향이 있다. 영장류는 세상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할 자원의 총합체로 보는 성향이 있다. 영장류는 이 원칙을 자연에 적용하는 만큼 다른 영장류에게도 적용하며 때로는 더 많이 적용한다. 영장류는 친구를 만들지 않고 그 대신 서로 연합하는 성향이 있다. 영장류는 동료 영장류를 단순히 바라보지 않고 감시한다. 그러면서 항시 이용할 기회를 노린다. 영장류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공격할 시점을 기다리는 것이다. 영장류는 변하지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 단 하나의 원칙에 근거해 동료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성향이 있다. 그 원칙은 바로 상대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으며 그 대가로 나는 어느 정도 해 주어야 하는가? 이다. 상대 영장류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영장류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스스로의 존재감을 저해하고 깨닫게 한다. 따라서 영장류는 행복을 측정하고 무게를 재며 수량화하여 계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영장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용-편익 분석이라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늑대는 영장류의 가치가 조잡하고 의미 없다고 말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산할 수도 잴 수도 거래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하늘이 두 동강이 나도 옳은 것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나는 운이 좋을 때가 아니고 그 운이 다했을 때 남겨진 나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다.
개이건 늑대이건 사람이 먼저 행동을 보여주고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하다.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인간 존재가 자신을 대상화해서 관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인데 이것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필연성에 지배받는 즉자적 존재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지배한다. 종교, 도덕, 과학 등이 정해 놓은 기존의 규칙이나 원칙에 의존하지 않는다. 특정 원칙, 도덕,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든 그것은 전적으로 각자가 지닌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영장류의 사회적 지능의 핵심은 속임수와 계략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늑대는 이런 진화의 경로를 밟지 않았다.
속임수와 계략은 영장류가 쾌락이라는 갈망을 추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인간의 철학은 이성과 지성 대 쾌락과 즐거움 간의 대립의 역사였다. 이성이나 지성은 인간을 구성하는 뿌리이며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성과 쾌락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긴밀히 연계되어있다. 이성은 부분적으로 쾌락욕구의 결과물이다. 속임수와 계략에 대한 욕구는 영장류에게 더 강하게 나타나며 위험도 그만큼 크다.
인간의 이성은 놀랍고 독특하지만 폭력과 쾌락추구의 욕구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기도 하다.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영장류만이 도덕적 동물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불만으로 가득하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나약함을 조작하는 동물이다. 늑대를 잡아서 개로, 들소를 잡아서 소로 길들인다.
영장류의 속임수와 계약은 자신보다 강한 영장류를 자신보다 약하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태초부터 삶은 제로섬 게임이었다.
어떤 분자는 주변의 취약한 분자를 포착하는데 탁월했다. 이과정이 수십억년 간 계속되면서 점점 더 복잡한 생명체로 발전했다.
하이데거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가치가 있는가?’라는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점이 인간만의 특징이자 가치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넓은 의미의 이성으로서 이런 이성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월성은 필연적으로 대상이 되는 생명체와의 연관 속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나에게 효용이 있는 것이 반드시 브레닌에게 효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은 각자 필요한 형태로 진화했고 그 형태마다 더 우월하거나 효용이 큰 기술이 다르다.
고통은 삶의 본질이다.
영장류는 자신보다 현저히 취약한 존재에 대해서는 도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명백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계약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거나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상대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약이 성립하려면 당사자들의 힘이 어느 정도는 동등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도움을 주거나 해를 끼칠 능력도 없는 당신보다 훨씬 약한 상대는 계약의 범위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절대약자에게는 도덕적 의무를 지킬 필요도 없다.
도덕의 목적도 더 많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사회계약설의 본질이자 이 가설의 바탕이 되는 첫 번째 전제이다.
두 번째는 더 나은 대가를 얻기 위한 기대 때문에 희생을 감수한다는 주장이다. 자유보다는 보호를 받는 문제가 시급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양도한다.
그런데 실상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실제로 자유를 양도하거나 희생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희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계약은 그 특성상 사기꾼에게 유리하다. 만약 당신이 사기꾼이라면 비용을 치르지 않고 계약의 효용만 얻어갈 수 있다. 계약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정교한 속임수다.
인간의 문명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능은 군비경쟁과 같은 경쟁의 산물이며 이 경쟁의 핵심에 거짓말이라는 탄두가 있다.
계약이란 결국 힘과 속임수의 문제다.
그것은 바로 한 때 늑대였던 우리의 모습이다. 이 늑대는 행복이 결코 계산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늑대는 진정한 관계는 결코 계약에 의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신의가 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한다. 계산과 계약은 항상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 속의 영장류는 결코 늑대보다 먼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 속에 태고적 신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해관계 없이 개를 사랑하고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한 거다.)
많은 철학자들은 행복의 본질적 가치를 주장한다. 행복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계산이나 이해관계를 떠난 행위 즉 무조건적 사랑, 봉사, 희생 따위에서 행복을 찾는 것)
행복이 무엇이든 그것은 감정이다. 영원토록 부질없이 감정을 추구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과 달리 늑대는 감정을 쫓지 않는다. 그들은 토끼를 쫓는다.
행복은 즐겁지 만은 않다. 동시에 매우 불편하다. 고생해 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그 가치를 모른다. 행복 자체가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행복의 필요조건으로서 다른 방식으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 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은 시야에 한계가 없듯이 삶도 한계가 없다고 했다.
죽음은 당사자에게 해롭지 않다. 에피큐로스는 죽음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죽음은 삶에 속한 사건이 아니라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해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욕망과 목표와 과제가 있기 때문에 미래도 있다. 그리고 그 미래라는 것은 우리가 각각 현재의 시간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죽을 때 잃는 것은 우리 삶에 투자된 것들로 설명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미래상을 그리며 인내하고 갱신하고 전진하고자 현재의 삶에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때 동물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죽을 때 더 많이 잃는다는 것이 우월성의 징표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주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미의 죽음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개념 속에는 삶의 의미를 좇는 우리가 있다.
삶의 의미는 우리를 발전시키는 우리가 성취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중요한 성취물 들은 바로 이 시점이 아니라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달성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시점이 되면 의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부재할 뿐이다. 그 시간이라는 선을 한참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부패를 만난다. 결국 모든 날아가는 화살이 잘려버리고 없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인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 자체만을 즐길 수 없다.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순간만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뒤로 유예되어 버리고 현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현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순간은 유예되어 시간 속에 퍼져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절대로 순간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늑대가 빵을 먹는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완벽한 현재의 순간 속에 빵을 씹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영원회귀 즉 영원히 같은 일이 반복되는 현상을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삶에서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동물이다. 만약에 행복이라는 것이 삶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삶과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이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시지프스의 실존상황은 그에게 행복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영원히 욕망을 충족시킨다면 그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최소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산을 하는 버릇 즉 영장류의 속임수와 계략이 우리의 영혼에 너무 깊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속임수와 계략으로 얻어낸 성공이 수반하는 감정을 좇고 실패에 따르는 감정은 피하려고만 한다. 우리는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다른 목표를 찾아나선다. 우리가 항상 무엇인가를 쫓아다니는 동안 행복은 우리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인간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은 순간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은 끝없이 지연되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겐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는 그것이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사랑하는 일이든 증오하는 일이든 간에 그가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우리가 삶에 큰 의미를 줄 수 있는 어떤 위대한 목표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삶의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삶의 의미가 어떤 최후의 지점이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 끝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만약 삶의 의미가 행복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삶의 의미는 바로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중에 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피조물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순간에 있다. 그래서 영장류가 삶에 대한 그럴듯한 의미를 찾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다,
살면서 만나는 몇몇 순간들, 이 특정한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순간들이 인생 최고의 순간인 것이다.
우리는 최고의 순간을 세 가지 잘못된 방식으로 바라본다.
1. 우리가 충분히 능력 있고 성실하다면 성취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누적이 아니라 세월이라는 시간 속에 흩어져 있다.
2. 최고의 순간이 강렬한 환희를 동반할 것이란 생각이다. 오히려 가장 불쾌한 시간 가장 어두운 순간일 수도 있다. 최고의 순간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때이며 이는 곧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매우 끔찍한 순간들을 감내해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3. 최고의 순간에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저 나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 모든 최고의 순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하며 나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정의하여 그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지 순간에 드러나는 특정한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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