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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강의(신영복)

by 굼벵이(조용욱) 2015.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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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德不孤 必有隣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은 추상적 가치나 초월적 가치보다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가치를 구합니다.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먼저 키워줌으로써 자신을 키우는 거죠.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주는 것이 仁입니다.

남을 먼저 세우고 자신을 세우는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입니다.

그게 和諧사상입니다.

쌀을 함께 먹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민주주의라는 의미입니다.

개인이기 보다는 철저하게 관계 속 하나의 구성원으로 보는거죠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

극과 극으로 치닫지 않고 개념화 범주화 대신

현실의 필요에 의하여 최적의 대안을 찾는 아름다운 동양사상입니다.

 

완성이나 달성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속도와 효율성은 자연원리가 아니고 자본원리입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합니다.

 

자꾸만 노동이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어갑니다.

이젠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흘러오는 것입니다.

과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시간이 흘러 올 뿐입니다.

우린 그걸 오롯이 현재에 맞아 내 멋대로 활용하면 되는 겁니다.(carfe diem)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과거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기에 禮, 樂, 射, 書, 數 6예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문사철 시서화 모두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요구되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 논리로

인간적인 논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름다움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합니다. 모름다움의 반대죠.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지요.

헌데 오늘날은 무조건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 상품미학이라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병폐지요.

팔기 위해 무조건 만들고 광고로 인식을 바꾸어버리는 거죠.

 

차이 짓기 방식은 결국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전체를 못 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쟁이 화합만 못한 이유입니다.

 

어느 경우든 知보다는 愚를 더 어려운 덕목으로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경우 우는 그 속에 대지를 품고 있는 우입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어리석은 척 하는 겁니다. 겸손이지요.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았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윗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욕심이 날로 사라지고 지혜가 날로 밝아진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상품을 자본주의의 세포라고합니다.

그러나 상품은 본질이 포장되어있습니다.

속과 같이 다른 것이지요.

수요에 의해서 창출된 것이 아니고 먼저 공급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수요를 만들어내려니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고 카피가 그 예입니다.

소비자를 속여서라도 수요를 창출해야 하니까요

결국 자본주의의 본질은 사기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기가 또 다른 상품을 만들면서 진화가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진화를 위한 필요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방식의 진화가 꼭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도 속이 아닌 거죽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과 같습니다.

각자가 한 점에서 부딪치며 짧은 만남을 이어갑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자백가의 자는 학자를 뜻하고 가는 학파를 뜻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공경대부 즉 제후와 대부를 지배계층으로 하고

사농공상을 피지배계층으로 하는 사회체제였습니다.

 

한마디로 맹자의 義는 仁의 사회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인은 개인적 관점의 인간관계이고 의는 사회적 관점의 인간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측은지심은 이타적 사랑이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늘이 준 마음이므로 결국 이타적 무조건적 긍정적 사랑은 천심

즉 하늘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용에도 天命之謂性이라 나와있습니다.

즉 천명은 性이라는 것입니다.

性은

‘生’ 즉 내가 어떻게든 살려는, 혹은 남을 살리려는 

‘心’ 즉 마음입니다.

남을 살리는 마음이 곧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는 사랑 즉 측은지심입니다.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의 신유학에서는

천리라는 주자의 성리학으로 연결됩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不忍人之心 즉 남의 고통과 불행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는 곧 ‘본성의 사회화’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사회화가 맹자라는 논리입니다.

수오지심도 사회와 더욱 관련이 있습니다.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구하는 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맹자의 盡心 상편에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두어야 하고

그러므로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수 없구나’ 라고 했습니다.

 

<노자>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결국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以無爲本 즉 무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체계입니다.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정리합니다.

무를 본으로 삼아 유를 말로 삼는 귀무론이 노자 독법의 기본입니다.

봄에 싻이 트고 여름에 자라 가을에 열매맺고 겨울에 죽음을 맞는 歸無입니다.

 

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사랑이 움직이듯 도도 움직입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닙니다.

노자 철학에서 無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이름 없는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이 붙여진 경우 인간의 의식의 지배하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도란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에 담을 수 없습니다.

도는 무궁무진한데 작은 개념그릇에 담아 그걸 도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거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한 인식, 가시적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입니다.

결국 무와 유는 동일체라는 선언입니다.

결국 알량한 머리로 행할 것이 아니라 계산 없이 가슴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이어가는 법칙이 도입니다.

근원적 법칙성인거죠.

알량한 머리 쓰지말고 그 근원적 법칙성에 맡기라는 겁니다.

人爲는 거짓 僞라고 봅니다.

인간의 개입 즉 잔머리 굴림은 그 자체가 거짓이라는겁니다.

세상 만물은 대립적인 것이 없고 항상 상대적이며 상호 전화합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끝없는 확대재생산과 대량소비의 악순환이 자본운동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 낼 수 밖에요.

難得之貨를 귀히 여기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知者들입니다.

그들이 페르조나를 만들어요.

사회성의 논리에 따라 획일화시키려 들지만 어쨌거나 인간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각자의 자유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받아들인 사회성의 논리가 각자 다를 수밖에요

그게 다양성입니다.

하지만 본질인 자유는 모두 같습니다.

그게 자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낮아서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입니다.

강 바다가 모든 계곡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입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독립적,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대한의 개념입니다.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장자의 소요

소요유는 말 그대로 아무 꺼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절대자유입니다.

포정해우 - 마음으로 소를 다룰 뿐입니다.

한마디로 人을 거부하고 天과 합일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사상입니다.

인간의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장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도를 깨닫는게 아니라 그와의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以理化精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계라는 것은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기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이를 생각하다보면 본성을 보전할 수가 없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않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것 뿐이네

 

기계는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살라는 천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지요.

빈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소요유입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조건이 되고있는거죠.

직접적 원인을 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게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연기설은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면 기쁨이든 슬픔이든 스며들지 못하네.

 

득어망전 득토망제(得魚忘筌 得兎忘蹄)

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을 잊고 토끼를 잡고나면 올가미를 잊는다.

고기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서 현상을 만드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고기보다는 그물을 챙겨야겠지요.

 

묵자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은 안 알아주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만 알아주는게 세상 인심입니다.

 

나라도 물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는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진 것입니다.

하나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순자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그냥 하늘일 뿐인거죠.

인간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에드워드 윌슨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이란 DNA운동 그 자체라는 겁니다.

DNA운동은 자기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즉 생존과 유전과 번식이 유일한 운동원리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닭보다는 계란이 먼저입니다.

닭은 계란의 생존기계일 뿐이라고 보는거죠.

식욕이나 성욕 따위도 DNA활동인 것은 물론입니다.

 

순자는 예를 기르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충족시키되 그것이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욕망을 위해서만

물이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균형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의 기원이고 따라서 예란 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른다는 것은 살리는 것이고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삶의 다른 표현은 사랑이고 그것이 살리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순자는 예 즉 제도의 의미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맹자에 비해

문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자의 인문사상이며 발전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순자는 수기보다는 치인을 앞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정의에 더 비중을 두는거죠.

인간의 도덕성도 수양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산물이라고 봅니다.

 

순자가 제시하는 난세의 징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요즘 세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모양이 여자같고, 풍속이 음란하고,

뜻이 이익을 쫓고, 행실이 잡스러우며, 음악이 거칠다.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며,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한비자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이로우며

인의 도리는 처음에는 즐겁지만 뒤에는 곤궁해집니다.

 

사기에 의하면 분서갱유 때 책을 불살랐지만 박사관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했으며

의약, 점복, 종수 등 과학서적도 제외했습니다.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두어 태웠던 것입니다.

권모술수의 대가 한비자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어 비운의 생을 마칩니다.

한비자를 죽인 이사는 법가적 단호함과 공평무사함을 지키지 못했기에

간신 조고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비명에 갑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覺에 있어 최고형태는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입니다. (변화, 생성과 소멸)

物자체는 설자리가 없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 전후방 연쇄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격물치지란 물과의 관계를 통해 인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다.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은 바로 理입니다

性즉 리입니다. 리는 법칙성입니다.

리가 성이며 천명입니다.

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임은 물론입니다.

성은 살리는 마음입니다.

살리는 마음은 바로 사랑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