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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최진석)

by 굼벵이(조용욱) 2016.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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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힌 고기는 생고기보다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생고기를 소화시킬 때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비축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비축된 에너지가 소화 이외의 곳에 쓰일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뇌발달의 한 요인이 됩니다.

불의 사용이 인간의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진화를 가져왔다는 이론 주장 근거입니다.

두껍고 강한 턱 뼈가 필요없어지게 되면서 두개골과 근육이 훨씬 얇아지고

내부에 뇌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져 뇌가 커진겁니다.

혀도 넓어진 공간에서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언어의 사용을 가속화시켰습니다.

(불의 발견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것이 뇌의 용량을 증대시켜 언어의 발달과 더불어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의 발견입니다.

그게 문명발달의 본질입니다.)


신석기 시대 전기는 약 1만년 전부터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대략 기원전 50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양사오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모계사회의 틀 속에서 빈부격차나 사람간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고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지만 계급적으로 우월한 위치의 지배자는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했으며 공동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대단히 평등한 사회였어요.


신석기시대 이후로 종법제도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적장자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해 대종이 되고 둘째 이하는 소종이 되는 친족제도가 형성됩니다.

종주는 종족을 이끌며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런 형식이 주나라(기원전 1046~256)에서 확장돼 통치자인 천자가 종주가 되고

제후는 소종으로 충실하게 복종해야 하는 체제로 구축됩니다.

나이를 중시하는 문화도 일정부분 여기에 기인합니다.

신석기시대 후기는 룽산문화를 통해 이해가 가능한데 기원전 3000~2000년 사이 일어났습니다.

농업혁명이 일어나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상승한 시기에 건설된 문화입니다.

농업은 남성의 근력을 요구했고 남성이 주도하는 관념이 발생했습니다.

남성이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려했고

이는 오직 한 여성을 독점해야만 실현 가능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성립된 것이지요.

정주형 경제활동인 농업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인구는 사회 형성으로 이어집니다.

사회형성은 질서를 요구했고 여성중심에서 남성중심으로 종법제도가 바뀌는 기폭제가 됩니다.

씨족간의 평등관계가 무너지고 계급이 출현했습니다.

특히 세습적인 지배자가 출현한 것입니다.

하나라는(기원전 2070~1600) 선양방식의 권력이양이 있었는데

혈연을 배제하고 오로지 능력만을 근거로 웡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은나라는 왕권의 기반을 천명에 둡니다.

조상신이나 하느님인 상제를 굳게 믿고 거기서 답을 얻으려 했습니다.

갑골문이나 점복이 이를 대변합니다.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덕이라는 개념이 출현합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에선 정당성을 천명 대신 덕에서 찾은거죠.

덕이 있으면 천명이 오고 덕을 잃으면 천명도 떠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신을 만족시킬 제사를 지내는 절차를 예라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는 덕을 지키거나 회복시킬수 있는 행위절차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천명이 인간의 내적인 상태를 고려하면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천명을 움직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게됩니다.

그게 덕입니다.

은나라 사람들은 신만을받들었기에 인간의 예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높이 공경하면서도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덕은 인간을 천과 연결시키는 매개자로 봅니다.

주나라의 통치자는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로 불렀습니다.

인간의 일이나 활동력 자체가 신과 상통한다는 자부심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해

인간사를 인간적 관점에서 처리하는 것이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돼요.

말하자면 진인사 대천명입니다.

덕은 밖에 있으면 이치가 되고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오면 덕이 됩니다.

덕의 원래 의미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내적인 마음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덕불고 필유린을 말합니다.

덕은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마음상태라고 했지요.

그래서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으로 회복돼야 합니다.

덕을 실천하는 사람이돼야 하지요.

공자는 아주 좁은 범위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향원이라 하는데

이런 사람도 덕을 망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나라는 전반기 서주(기원전1046~771) 후반기 동주(770~256)로 나뉩니다.

동주는 춘추(기원전 770~476)와 전국시대(475~221)로 나뉩니다.

중국의 인문사조는 바로 춘추말 전국초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기꺼이 따르기로 하고 받아들이던 하늘의 권위있는 명령을 천명이라고 당시사람들은 불렀습니다. 

이 천명을 덕을 통해 대체합니다.


철기가 산업에 투입되고 나서 급격히 성장한 생산력이 인간의 자부심을 키우는 동력이 됐고

그 자부심은 마침내 천명의 절대권위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는 진시황의 법이 등장하면서 완결됩니다.

철기시대가 진시황을 탄생시킨겁니다.

천명론을 극복해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최초의 철학자가 노자와 공자입니다.

공자는 인간의 본질을 仁으로 봤습니다.


노자는 자연의 특성을 기반으로 천명 속에 내재된 문제점인 비의성, 주관성, 임의성을 극복하고

투명성, 객관성, 보편성을 확보합니다.

공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영감을 얻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형식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노자는 본질을 부정하고 자기 사상의 토대를 자연에서 알아낸 관계성에서 구합니다.

관계성은 유와 무라고하는 두 대립면의 상호관계입니다.

노자는 공간이나, 시작이나, 출발처럼 스스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지 않지만

이 세계가 작동하거나 존재하게 하는 어떤 영역이 있는데 이를 무로 본 것입니다.

자신의 구체적 존재성을 갖지 않는 어떤 상태가 무입니다.

동양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낳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낳습니다.

몸 안에서 기능하는 영역을 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고 한겁니다.

유와 무는 공존하고 협력합니다. 同出이라고 말합니다.

유는 그의 대립면인 무와의 관계에서 유가 됩니다.

노자는 바로 유무상생의 존재형식에 도라는 명칭을 붙일 뿐입니다.

유무상생의꼬임이지 '없는 것'입니다.

득도는 유무상생의 원칙을 체득한다는 뜻입니다.

(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살아서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모짜르트는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 안에 있다" 고 함

혜민스임도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쉼표 즉 거리감에 있다고 함

모더니즘과 유학은 실체론에 가깝습니다.

이는 본질론을 의미해요.

인이라는 본질이 있고 이를 토대로 인간성이 확장되고 인간으로 성숙됩니다.

관계론에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불교, 도교, 주역의 세계관이 이에 속합니다.

본질주의는 기본적으로 가치론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을 인정한다고 하면 그 본질은 이상적인 단계로 상승해야만 합니다.

이상적이라는 것 자체가 가치론적 판단 아니겠어요.


노자는 가치론적 판단을 모두 걷어내고 이 세계를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단계를 무위라고 했어요.

불교도 대표적으로 사실 지향의 경향을 보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집착에서 찾습니다.

왜 집착할까요?

그 대상을 더 좋은 것 또는 진짜라고 가치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이 세상이 사실로만 되어있으며 그 사실 속에서

자신의 가치론적 감정의 동요가 없어야만 세계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은 반야(지혜)의 핵심경전이란 뜻입니다.

불교는 이세계를 고통의 바다로 봅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벅 즉 해탈이 불교의 목적이지요.

해탈이 어려운 이유는 업을 쌓기 때문입니다.

업을 쌓기 때문에 윤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나는 모든 욕심이나 욕망도 모두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부모나 사회로부터 학습된거죠.

왜냐하면 그게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은 다시 말하면 살려는 의지에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생의 추동인거죠.

하지만 그런 생존능력은 일정 시점에 이르면 안정이 확보되어 더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끝까지 고집하는데서 문제가 생겨요.

그걸 고집하다가 결국 삶의 본질을 져버리고 불행한 고해의 바다에 사는거죠)

(인사이론도 같습니다.

평가를 한다며 강제적으로 SABCD를 할당해서 성과급도 주고 승진도 시킵니다.

이건 순전히 가치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역량과 업적을 정의한 거지요.

결국 수재집단에서 C를 맞은 사람과 둔재집단에서 C를 맞은 사람을 같다고 평가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하지만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수 없다고 해요.

제가 보기엔 이런 평가는 차라리 안하는게 낫습니다.

수재집단 C는 둔재집단 S보다 나은 경우가 허다해요.

이제는 인사관리도 가치론적 입장보다는 관계론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억지로 SABCD를 메기면 안됩니다.

평가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조직의 고유목적인 화합, 조화, 협업을 통한 시너지가 생겨나요

억지로 평가하면 이 모든 목적들을 훼손하게 됩니다.)


이세계의 진실한 모습을 모르기에 그림자에 집착하게 되는겁니다.

실상을 아는 경지를 覺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즉 이 세계가 그림자처럼 존재한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 집착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을 짓는 행위 즉 어떤 것을 자기 뜻대로 정해버리는 행위가 불교에선 소유입니다.

자기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버스를 내가 탈 버스라고 마음 속에 정해버리는 그것이

소유적 태도이자 상을 짓는 태도입니다.

무소유란 재산을 갖지 말란 의미 보다

자기 마음대로 상을 지어서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불교에선 모든 것을 잠시 있는 것 가유라 칭합니다.

불교사상의 근간이 되는 삼법인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諸法無我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본질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인연입니다.

관계로 되어있어요.

많은 것들의 조합으로 되어있어요.

諸行無常 세상의 어떤 인간관계도 지속성이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幻입니다.

요즘 말로 사이버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순양지절 4월은 순전히 양기로만 차있는 달입니다.

10월은 우주가 음기로만 가득차게 되지요

점을 친다는 것은 그 안에 시간 개념이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이 세계의 모든 시간성은 모순이 잉태하는 것이에요

내 안의 어떤 모순이 흰머리를 나게 하는 겁니다.

반야학이나 노자철학엔 모순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반합 과정이 없지요.

모순이 있어야 비로소 정반합의 운동이 가능해집니다.

주역은 그래서 헤겔과 통합니다.

불교나 주역, 노자가 말하는 관계는 존재하는 그것 자체가 관계로 되어있음을 뜻해요.

주역의 저자가 세상을 음과 양으로 보듯 노자는 세상을 유와 무로 보았습니다.


인에서 극기복례라는 사회활동의 기준 즉 행위규범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대국가시스템인 중앙집권 시스템이 도출될 수밖에 없지요.

무위는 근본적으로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고 유위는 봐야 하는 대로 보고 반응합니다.

노자 사상의 기본은 자연질서를 인간질서로 응용하자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질서를 도라고 일렀지요.


플라톤은 세계를 완벽한 세계와 불완전한 세계로 보았습니다.

본체계와 현상계로 나눈 것이지요.

본체계를 이데아라고 하는데 사실 이세계는 관념의 세계에요.

사유 속에만 존재합니다.

눈에보이는 현상계는 모두 변합니다. 유한합니다.

따라서 완벽한 세계가 아니에요.

서양 주류 철학자에 의하면 참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항상 사유 안에 존재합니다. 

서양철학은 그래서 기본적으로 사유의 구조물입니다.  

완결된 사유의 구조를 서양에선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현상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경험 역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니체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이성은 정신으로 존재하고 의지는 육체로 존재하죠.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성의 시대입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육체성입니다.

즉 구체성입니다.  

인간의 존재근거가 이성 대신 욕망(권력에의 의지)으로 설명되면서 현대가 시작됩니다.

육체성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됩니다.


집단에서 개별로 보편에서 특수로 본체에서 현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가는 채우고 또 채워서 그 높이를 우주의 높이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보고

도가는 비우고 또 비워서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거든요.


유교철학과 서양의 모더니즘은 매우 닮아있어요.

가변의 유한한 세계를 지배하는 불변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서양철학의 출발점입니다.

공자와 노자는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는 기본 틀을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 냅니다.

현상을 긍정하는 겁니다.

경험을 진실로 봐요. 실제현상이 진실입니다.

달리말하면 변화를 긍정하는 겁니다.

본질주의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본질주의적 세계관입니다.


하늘이 청명하려고만 하면 무너져내릴 것이고

땅이 안정을 유지하려고만 하면 쪼개질 것이고

통치자가 고귀하려고만 하면 실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귀함은 비천함에 뿌리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한다.

光而不耀(광이불요), 和光同塵(화광동진)

빛을 발하지만 눈부시게 하진 않고 빛나되 먼지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합니다.

자기의견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지적인 토대가 얕아요.

과감한 사람일수록 지적인 넓이가 좁아요.

경계를 품은 사람일수록 과감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진리임을 확신하지 않습니다.

노자가 보는 지는 제한적인 앎입니다.

작은 대롱구멍으로 세상을 보는거죠.

자신에 대해 아는 앎이라야 내면에서 주, 객관이 통합됩니다.

이를 노자는 명이라고 합니다.

도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지를 부정합니다.

명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요.


예에는 반복훈련이 매우 중요합니다. 習이지요.

본질주의적 세계관에 따르면 존재는 그 본질을 자신의 존재근거로 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 본질과 일체가 됩니다.

노자는 스스로를 스스로의 주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나라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청맹과니 헛똑똑이들이 설치는 세상은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릅니다.

확신하지 않는 힘이 내공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위의 문제지요.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배움은 수단이고 자기표현이 목적인 것이죠.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에게서 차지하는 배움의 비중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대신 자기를 표현하려는 용트림을 해야 해요.

대개 가치관이 바른 사람들,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이 예리하고 솔직합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죠.

스스로 가볍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죠.

반면 대립면을 살피며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신중합니다.

어떤 다름을 가지고 평가하지 않아요.

죽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가 철학은 잡종이거나 혼탁합니다.

반면 유가는 순수철학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입니다.

處其實 不居其華

꾸며진 세계는 화려합니다,

장식되어있으니까요.

모든 장식은 인위적인 조작입니다.

언어적이고 개념적이며 이념적이죠.


우리보단 나에 집중해야지요.

자신의 내면적 자발성에 주도권을 두고 하는 행위를 무위라고 합니다.

學 즉 배움의 출발은 모방입니다.

(학을 승화시켜 도의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도는 학을 전제로 합니다.

도는 학에서 나옵니다.

학이 전제되지 않은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공부하라고 하는겁니다.

그리고 그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도가 끝이 없듯이...)


無爲而無不爲

무위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

天長地久

천지자연은 장구하다.

(자기자신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았기에 천장지구한거다.)

세계의 변화는 사람에 맞추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변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세계에 맞추어야지요.

그게 무위입니다.

(나는 무조건적 긍정적 사랑, 수용을 주장하는 인본주의적 사조를 노자의 무위로 해석합니다.

결국 노자가 2500년전에 내가 주장하는 코칭경영을 주장한 겁니다.

반면 공자는 요즘 정부가 강요하는 성과주의 경영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변화의 흐름은 백성들의 움직임 안에서,

직원들의 움직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자신이 지배하고 통제하고 지시할 일이 아닙니다.)


자식은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뻐보이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됩니다.

기다려줘야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리세요.

자라기 전에 뽑아올리면 곧바로 죽습니다.


거대한 것은 대개 이념의 구조물이거든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념이 아니라 일상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에게 집중하는 사람이 진정 힘있는 자라고 이릅니다.

그러니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하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