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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고민하는 힘(강상중)

by 굼벵이(조용욱) 2016.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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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민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귀속되는가?

나는 무엇에 근거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와 만나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 믿을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기는 한 건가?

등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그는 막스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에서 찾았다.

그들에게서 그는

고민하는 힘이 사는 것이며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임을 배웠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은 구원받기 힘들다.

 

세상을 둘러보면 니트족(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이나 프리터(Free +Arbeiter)이 넘쳐나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울증에 빠지거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의 산물입니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게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타자와 상호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즉 타자를 배제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한 거다.

타자에게 인식된 형태로의 자아만 존재하기 때문에 소통을 통해 나의 자아를 인식시켜야만 한다.)

각각의 자아가 제멋대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상을 그리고 있다면 자기와 타자의 공존론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고립된 인간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문명은 우리를 고립시킨다고 다이스케는 해석했다.

(현대 사회 SNS를 통한 소통도 있지만

cell phone 등을 통한 개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됨으로써 인간은 이제 국가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으로의 삶을 선호하고 개인으로만 살아간다.

하지만 개인은 본질적으로 취약하고 따라서 쉽게 붕괴되어질 수 있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은 취약한 개인을 편안하게 놓아둘 리가 없다.

언젠간 약육강식이 전쟁 등을 부르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집단의 필요성에 귀의하게 된다.

그게 인간의 역사였고 예견되는 윤회다.)

 

K가 유일한 친구였던 자기로부터 우정을 잃고 고독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선생은 마음이 얼어붙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자유와 독립과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 대가로 이런 쓸쓸함을 맛보아야 하겠지요.


나쓰메소세키의 메모엔

자아의식(Self consciousness)은 결국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다.

 

야스퍼스는 막스베버를 사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

나는 죽기 전에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진지하게 믿으며 죽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한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뼛속까지 진지합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것, 거기에 어떤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요?

 

평소에는 모두 착한사람이에요.

다급하게 돈이 개입하면 달라집니다.

인간관계는 완전히 파괴됩니다.

돈이라면 어떤 군자라도 악한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역사 문화발전의 끝에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현대문명은 완전한 인간들을 매일매일 불구자로 망가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자살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갑판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간 ‘그냥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슬로우모션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배를 그냥 타고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없는 후회와 공포를 느끼며 검은 파도 속으로 조용히 떨어져갑니다.


칸트는 인간의 머리 위에 하늘의 법칙이 있고 또 하나 그에 필적하는 훌륭하고 귀한 세계가 인간의 내부에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자는 자연의 법칙이고 후자는 인간의 도덕률입니다.

 

청춘이란 한 점 의혹이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들의 집적입니다.

막스베버는 자기를 가리켜 종교적인 음치라고 자조하듯 말했습니다.

 

그는 문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을 지나가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일을 해야 제구실을 하게 된다.

일을 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의 배려, 타자에 대한 배려이다.

특히 타자로부터의 배려가 중요하다.

(여기서 제 구실이란 신이 내게 내린 역할이다.

사람은 이 역할극을 훌륭하게 끝내고 관객을 떠나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인생은 일 그 자체다.

누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거다.

각각 대통령, 한전인, 금융인, 구두닦이, 농부, 어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거다.

직업은 인생 그 자체이기에 소중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일에 몰입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한다는 행위의 가장 바닥에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함부로 폄하해서도 빼앗아서도 안 되는 거다.)


사랑하는 자유를 얻게 되면서 사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아이러니 이것이 자유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각자 나의 행복과 타자의 행복을 양 극단으로 하는 무수한 중간들을 사랑이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사랑은 그 때 그 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즉 사랑은 변한다는 거죠.

그러니 사랑이 식을 것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무한히 진화해 가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무의미하다.

죽음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 또한 무의미하다.’ 고 했습니다.

자유와 고립된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 대가로 쓸쓸함을 맛보아야 하겠지요.

자아를 보존해 가기 위해서는 역시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하겠지요.

상호인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자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에 갇혀서 성을 만들지 말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고 나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확신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인간에게 궁극적인 공포는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노인의 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죽음은 아주 흔한 것이고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이처럼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적어도 죽음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두렵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고령자가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뻔뻔한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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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한 좋은 말씀을 일지 이승헌님이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몸 모든 부분은 각각의 움직임에,

그리고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전체의 변화에,

항상 감각을 열어놓고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는 지구의 공전 자전 원리와 같습니다.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돕니다.

 

모든 건강한 세포는

전체를 중심에 두고 각자 활동을 조절합니다.

우리 몸이 그렇게 하고 있고,

지구가, 태양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속에

공전 궤도를 지키지 않는 자전처럼,

자신이 지닌 정보와 에너지를

주위와 나누지 않는 잘못된 활동이 있습니다.

바로 암세포입니다.

 

암세포는 주위와 모든 의사소통을 단절한 세포입니다.

암세포는 전체를 죽게 하고

결국에는 암세포 자체도 파괴합니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공전과 자전,

감각을 열어 서로 교감하는 힘을

키워주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하늘이 비를 내릴 때 곡식에만 비를 내리고

잡초에는 비를 내리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것을 해야 하고,

행복한 순간을 위해서는 행복하지 않은 일도

때때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찾을 수 있습니다.

(일지 이승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