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걸 인정하고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
죽을 똥 살 똥 욕심에 젖어 제 것, 남의 것, 더운 밥, 찬 밥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려 하거나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보람있는 삶인지 돌아보게 한다.
남의 아내를 탐해서는 안 되듯이 남의 돈을 탐해서도 안 된다.
언젠간 너도 죽으니 네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을 참되고 보람있게 살아라.
너보다 조금도 못나지 않고 너와 똑 같은 사람들이니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들 위에 서려는 생각일랑 아예 버리는 것이 좋다.
인류 역사상 모든 인간이 교만에서 성장했고 교만 때문에 불행하게 죽어갔다는 걸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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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커는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 행위는 죽음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에서 결정된다고 했다.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동기는
첫째, 인간은 자존감을 보호하고자 한다.
둘째,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은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암시가 개인 및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했다.
(나는 저작자들과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접근한다.
결국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오래된 뇌의 명령이다.
다시 말하면 종족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프로이트의 이론도 창출되었고 헤겔의 이론도 창출되었다.
모든 행동의 근원에 이성에게 잘보여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유전자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박쥐와 지렁이와 달리 인간은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머지 않아 죽음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불안의 이면에는 생명체의 기본 의무인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욕망이 필연적으로 좌절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살아간다.
뇌가 진화하면서 특히 중요한 인간의 지적능력 두가지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고도의 자기인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생각하는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자기 자신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생명체는 인간 밖에 없다.
거기에서 모든 행동의 원인이 생겨난다.
사자가 자기를 덮치려는 순간 사슴의 뇌는 편도체에서 변연계에 신호를 보내 투쟁, 도피, 동결이라는 반응을 만들어낸다.
사람도 똑같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과제가 죽는 법 배우기라고 규정했다.
헤겔에게 역사는 사람이 죽음에 맞서 무엇을 하는가를 집성한 기록이라고 했다.
어린이도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에서 문화로 주의를 옮겨간다.
죽음은 자존감을 높인다.
인간은 죽을 운명임이 아주 살짝만 암시되어도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심한 자아도취에 빠져있으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를 모욕한다고 느끼는 사람을 특히 공격적으로 대한다.
(아무개가 내게 공격적이었던 이유를 알아냈다.
그녀석은 자존감도 낮은데에다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던거다,
아마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던 것 같다.)
자아도취자는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같은 분야에서 성공한 다른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며 누군가가 어떤 점에서 확실히 우월한 경우 당혹감을 느낀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은 철사 어미에게 길러진 원숭이와 같다.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고 새롭고 갑작스런 사건을 두려워하며 자기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폭발을 일으키기 쉽다.
우리 조상들은 포식동물을 피하고 고기같은 식량을 더 효율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살았다.
니콜라스 험프리는 자의식은 사회생활에 적응한 결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의례가 과거의 성공에서 기인했다는 추측은 거의 확실하다.
양손 가득 먹이를 가져온 사냥꾼이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전사는 모닥불 주위에서 감탄하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실감나게 재연했을 것이다. 그것이 사냥이나 전쟁에 나가기 전 의례를 거행하는 단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처음에 사원이 생겼고 그다음에 도시가 생겼다. (슈미트)
의례 및 종교목적으로 건설한 장소에 모여 생활하다보니 농사짓는 방법도 배우게 됐을 수도 있다.
그랜트 앨런이 신이라는 개념의 진화에서
무덤을 파는 과정에서 땅이 갈리고 다양한 부장품과 함께 가장 좋은 곡물을 시체와 함께 매장하는 행위가 최초의 파종이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내 생각 : 인류 집단역사의 시작은 신화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신화를 통해 사람들을 위협이나 공포 또는 경외로 몰아 집단을 한 방향으로 모으고 모아진 사람들이 집단농경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신화는 의례를 설명함으로써 이를 정당화하고 예술로 미화하며 사회행동의 모든 면을 규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종교를 만든다. 종교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존재하는 삶이란 개념을 심어줬으며 이러한 존재들이 어떻게 소통하고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주었다.
종교가 없었다면 대규모 인간집단에서 조화롭게 협력하는 일은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뒤르켐이나 데이비드 슬론 윌슨은 종교가 번창하고 발전하는 유일한 이유는 통합과 조화를 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환상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현실 사고가 작동할 수 없다.
예술 종교 의례 따위가 농경, 과학 기술의 발달을 가져온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고대 수메르인 서사시)
영혼은 저항할 수 없는 심리적 힘, 즉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우리 의지와 죽음이라는 불변의 생물학적 사실이 충돌하는 빅뱅 속에서 탄생했다. (랭크)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명성
1. 만물은 그 반대성질에서 생성된다. (죽음은 삶에서 비롯되듯 삶도 죽음에서 비롯)
2. 아기가 경험 없이 어떤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이런 정보를 신생아에게 전달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3. 세상에는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두가지가 존재한다.
4. 세상의 만물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무형의 정적인 형태에서 비롯되었다. 바퀴는 둥근 형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바퀴가 사라져도 둥근 형태는 그대로 남듯이 모든 육체활동은 영혼에서 비롯되며 영혼은 삶의 근원으로서 사후에도 존속한다.
사고야말로 실재의 근본이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 즉 영혼이 생각을 한다.
데카르트는 육체의 부패가 정신의 파괴를 암시하지 않는다고 하며 영혼의 존재를 입증했다,
금은 화학적 변화를 겪지 않아 불명성과 연관되어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영생이 가능함을 증명하고자 노력해 54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열량을 적게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느리게 하면 장수한다.(도교)
애덤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는데 필요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손에 넣기 위해 부를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즉 과시적 소비다.
죽음을 떠올린 후 실시한 투표에서 카리스마 후보에 대한 표가 거의 8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간이 증오와 폭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집단생활하는 영장류의 습성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침팬지는 자기 영역을 지키고 확장할 때 공격성을 드러내며 가끔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른 침팬지를 죽이기도 한다.
오직 인간만이 다른 신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또는 다른 깃발에 경의를 표하거나, 수백, 수천년 전에 겪은 굴욕감으로 타인을 증오하고 죽인다.
죽음을 초월하려는 욕망은 폭력을 부채질한다.
우리는 타인을 고정관념에 끼워맞춤으로써 우리가 가진 문화적 사물체계를 공고히 한다.
모욕은 죽음보다 나쁘다고 생각한다.
트로이 전쟁은 파리스가 스파르타 메넬라오스 왕비 헬렌을 유혹하여 트로이로 데려가 그를 모욕했기에 생긴 전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상당부분은 악의 세계를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어니스트 베커는 죽을 운명을 부정하고 용감무쌍한 자아상을 획득하려는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충동은 인류 악의 근본 원인이라고 했다.
신념을 위해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모든 위협과 폭력행위에는 앙갚음을 하려 한다.
인류문화는 동물과 유사한 신체부위를 가려왔고 이로써 인류는 자연세계가 아닌 문화세계에 속해 있다는 증명을 해온 것이다. .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경우 두가지 심리적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하나는 의식선상에 나타난 죽음을 중심방어(proximal defence)를 이용하여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억누르거나 딴 곳으로 돌리거나 미래의 일로 돌려 미루거나 피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말단방어(distal defence)로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논리나 의미와 관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중심방어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정신의 최전선에서 밀어내 버리고 말단방어는 무의식적인 죽음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죽음의 위협이 발생했을 때 정면대응할 수 있다.
낙관주의자들이 건강관리에 힘쓴다.
건강은 단순히 질병을 앓고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억제되지 않은 죽음의 공포에 저항하기는 힘들다.
죽음에 관한 생각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심화한다.
정신분열증, 불안장애,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부분적으로는 죽음의 공포에 부적응한데서 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자살은 죽음의 공포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려고 자살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이 비이성적인 일임을 인색하야 한다.
삶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할 때 최후의 달콤함을 끌어낸다.
우리는 미래세대가 성장하도록 죽어야 한다.
삶은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사용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는 "죽음과 타협하라, 그러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고 했다.
철학학습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몽테뉴는 "언제 온다고 해도 죽음은 내가 훨씬 전에 예상했던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축제에 질린 손님처럼 인생을 뜨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로버트 제이 리프턴은 '망가진 관계'에서 죽음을 초월하는 핵심적인 방법 5가지를 소개했다.
1. 생물사회학적 초월 : 내가 아니어도 나의 유전자, 역사, 가치 따위는 혈통, 종족, 민족 정체성과 동일시되어 전해진다.
2. 신학적 초월 : 영혼에 대한 믿음으로 생명력과 영적으로 연결된다.
3. 창조적 초월 : 혁신, 예술 과학, 기술 등으로 미래세대에 기여한다.
4. 자연적 초월 : 모든 생명체, 심지어 우주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5. 경험적 초월 : 경외감과 영원함이라는 감각을 수반한다. 명상 등으로 몰입하여 느끼는 초월이다.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는 모든 '주의'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가 그들의 방식이 유일한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주의는 해당 주의의 신화와 교리 의례와 규율을 궁극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절벽세계관을 소용돌이 세계관으로 극복해야 한다.
본인의 신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유일한 진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은 궁극적인 의미와 진실이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 감각, 지능, 문화적 장애들로 의식을 제약하므로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죽음과 타협하라.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실은 단 한순간도 그곳에 있었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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