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견해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오직 한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한 경우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어질 수 없다.
소로의 견해는 시민불복종을 지향한다.
시민불복종은 자유주의자가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저항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마르크스의 꿈은 언제든 사람들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앨빈 토플러는 완력에서 돈으로 그리고 돈에서 지식으로 인류문명을 관통하는 보편적 권력이 이동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덕이 있는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만물에는 고유의 텔로스(telos) 즉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그가 국가의 텔로스라고 생각한 것은 정의였다.
우리는 계급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고 하지만 그는 계급특권을 정의라고 했다.
부분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만 전체는 부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너를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무엇이 선이고 정의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가 철인왕을 생각한 것은 지식과 지혜가 모자라면서도 완력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른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밥을 해 주고 냉장고는 시원한 음료를 주는 데 아빠는 내게 해주는 것이 없다.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트라시마코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다.
그는 국가는 선이나 정의, 덕을 실현할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인간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공백이 있는 곳 어디에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투쟁이 발생한다.
결국 완력, 돈, 지식이라는 수단과 결합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처벌과 위협을, 복종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압도적 폭력을 구축한다.
거기서 국가가 생겨났고 따라서 선이나 정의 같은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강자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며 법은 큰 고기들은 빠져나가는 촘촘한 그물이다.
(결국 선이나 정의, 지혜는 강자의 인간성에 달렸고 선심일 뿐이다.
늘 경계하며 강자를 감시하고 시민불복종이나 촛불을 밝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가장 부작용이 적은 정치제도라는 점을 알고 주권자로서 참여하여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피히테는 살아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정신적 발달이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번성한다고 주장하며 언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톨스토이는 애국심을 인위적이고 유해한 감정이므로 근절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자기들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게 된다.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세계적 군비확장과 파멸적 전쟁은 바로 이 애국심에서 야기되었다.
독일은 일본과 달리 침략전쟁을 벌인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다 죽은 독일군인을 애국자로 추모하지 않는다.
르낭은 민족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의 공동체라고 했다.
예컨대 프랑스 남부와 북부의 결합은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몰살과 테러의 결과였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정치발전 말고는 설욕이라는 해로운 욕망, 몰살로 무한정 연장되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민의 ‘함께 귀속되고자 하는 의지’뿐이다.
그 의지의 뒷받침을 받을 때라야 애국심은 가치가 있다.
애국심은 배타적인 사랑의 감정이다.
포퍼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는 혁명에 플라톤식 접근법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공학(utopian engineeri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플라토닉 접근법이란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그는 자유가 기회균등을 넘어 모든 것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혁명의 유일한 목적은 민주주의 수립이어야 한다.
민중이 뚜렷하게 자각한 요구를 지니고 있을 때 사회의 지배층이 점진적 공학에 입각한 사회적 개량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난다.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익 또는 사회 일반의 이익도 개인의 이익을 합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공공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수립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공동선 또는 일반이익을 명분으로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 권력의 제한이었다.
분배정의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모든 정책은 결국 법치를 파괴한다.
자유와 경쟁이 초래한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법치를 파괴한다.
법치가 파괴되면 자유를 지킬 수 없다.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인간이 사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자유가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
시장은 자유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국가는 시장을 지배하려하기 보다 시장의 힘에 순종해야 한다.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베블렌은 인간이 모두 보수적이라고 했다.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 되는 과정이다.
사회의 진보는 생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원치 않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회제도는 사유습성의 산물이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제도는 과거 어느 시기에 사회를 지배했던 관점과 사유습성을 체현한다.
사람들은 그 제도 속에 살면서 과거에서 전승된 정신적 태도에 따라 사유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그 변화는 끊임없이 현실에서 더 적합한 관점과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유한계급은 보수주의의 몸통이다.
진보는 단결하는 능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인간의 자유를 얽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
(나의 관점에서 보면,
잘난 사람들이 주장하는 진보도 결국은 자신의 잘남을 뽐내고 보상받기 위한 이기적 발상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진보만큼 영리하지 못하다.
그래서 부족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하게 결속한다.
이 또한 살아남으려는 보수의 이기적 속성이다.
그래서 보수의 결속 연합은 연합하지 못하는 똑똑한 개인주의 진보를 언제나 이긴다.
그건 진보가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자연법칙이다.)
자연은 목적 없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인식하고 언어를 통해 밝힌다.
정의는 특정한 사물을 평등한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은 박정희 정부가, 국민연금은 전두환 정부가 기획하고 노태우정부가 도입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새로 도입했다.
복지국가론은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수급자가 아니라 수급권자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니버
개인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하는 헌법 1조는 1919년 3.1운동 직후 대한미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처음 등장한 이래 현행헌법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시장은 결코 정의를 실현하지 않으며 반드시 사회정의를 위협한다.
니버는 점진적 개량을 옹호했다.
점진적으로 개량해 가는 사회는 급진적인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역사와 자연의 현실에 좌초하고 마는 사회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했다.
정치인이 따라야 할 도덕법
막스 베버 - 정치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자신이나 타인의 영혼을 구하려는 사람은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과업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에도 악마성이 내재한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욕구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은 자율적 행동이 아니다.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율적 행동이다.
도덕법은 순수이성의 직접적 명령이어서 선험적으로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인간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동기에 있다.
칸트는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이성이 직접적으로 그 규칙을 명령한다고 했다.
이것이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1. : 너 자신의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정언명령2. : 나 지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스스로 세운 행동준칙이라도 실천동기가 불온하다면 정언명령2에 위배된다.
칸트의 도덕법은 북극성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 닿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별을 보면서 삶의 바다를 항해한다.
칸트에게 최고 선은 도덕적으로 가장 완전한 의지가 최고의 행복과 결합하여 이 세상 모든 행복의 원인을 이루는 지성의 이념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
동기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동기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활동이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법에만 의지할 경우 정치인은 의도하지 않는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다.
베버- 정치는 결과로 책임지는 일
정치는 폭력이 본질적 특성이다.
국가의 합법적인 강제라도 엄연한 폭력이다.
베버는 좋은 정치인의 자세로 세가지를 들었다.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이다.
현실을 관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그가 종국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책임의식이었다,
정치인에게는 특히 책임윤리가 강조 된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고 그 결과를 신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낳게 될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균형감각으로 졌지만 결코 지지 않은 베른슈타인
오늘의 독일 사민당의 모태가 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정 개량했다.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 자신의 이론과 자기가 하는 정치활동에 대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성찰하게 한 균형 감각이 그를 개량주의로 이끌었다.
오로지 신념윤리 하나만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정치가 중 일부는 인류에 대한 범죄자가 되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내포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론가로 남았지만 베른슈타인은 정치가로 살았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성과 사상적 포용력을 강조했다,
(보수, 진보, 자유주의는 목적이 바르고 명확하다면 대의를 위해 언제든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연합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진보도, 진정한 자유주의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사익만을 추구하는 개별 이익집단일 뿐이다.)
진보의 힘은 순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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