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불행하다(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근세는 종교에서 분리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사람은 아슬아슬한 갈림길에 맞닥뜨렸을 때 종교인이 되거나 예술가가 된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형은 종교인이고
자기를 긍정하고 작품으로 표현하면 예술가입니다.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모두가 그렇다고 하면 정답이 되고 맙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자기를 찾으라고 외치며 우리를 부추기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빈틈없는 마물 같은 시스템은 상품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이용하는데 매우 뛰어납니다.
특히 불안의 냄새가 나는 것을 이용하는데 매우 뛰어납니다.
신뢰라는 것은 일단 무너지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과학에 의한 합리성이나 이지에 의한 언어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본성의 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본래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끝나기 위해 시작하는 거야.
너희도 태어나는 순간 죽어가기 시작하는 거지.‘
(엔트로피가 진행되는거죠. 그런데 그 죽어가는 과정이 갈수록 힘들어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죽고싶겠지요.)
죽든가, 미쳐버리든가, 종교에 입문하든가 내 앞길에는 이 세 가지 밖에 없어.
(라고 하는 답을 내어 놓을 수밖에요)
왜냐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뭔가에 의미가 있고 없고가 아니고
보기에 좋은 무언가가 되어 성공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척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얼마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결국은 신념체계로 귀의합니다)
이글턴은 그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은 그 근간에 있는 신의 사랑이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살기 힘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든 전향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고 싶은 마음입니다.
(빅터 프랭클로 귀의합니다)
인간에게 정말 귀중한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과거 아닐까요?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미래라는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상태입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는 확실한 것입니다.
시장경제에서는 소비의 신진대사를 가속하기 위해 철저하게 미래만을 문제 삼습니다.
인간의 세 가지 가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입니다.
경험입니다.
태도입니다. 이는 마음속으로 빌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즉 상대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것이지요.
프랭클도 자신을 넘어서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눈은 사물을 보지만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 보다는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히 쌓아나가면 저절로 충분한 행복이 찾아온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죽지마시라.
'삶의 지혜를 찾아서 > 인문학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의 경계(김성호) (0) | 2017.06.25 |
---|---|
이기적 유전자(리차드 도킨스) (0) | 2017.06.21 |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 (0) | 2017.05.21 |
지혜의 심리학(김경일) (0) | 2017.05.14 |
카네기 인간관계론(데일 카네기) (0) | 2017.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