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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장미도둑 외 아사다 지로 단편선

by 굼벵이(조용욱) 2019.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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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 51년 도쿄출생.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중학에 진학하는 등 순탄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집안이 몰락하는 충격을 겪으면서 뒷골목 불량소년이 된다.

고교 졸업 후 20대를 야쿠자 생활로 보내다가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글을 읽고 소설가가 되었다는데.

그의 글과 생각이 정말 대단하다.

내가 좋아하는 성장소설류의 글이 많다. 

 

수국꽃 정사

 

그치만 남자 아쉬운 줄은 몰랐어요.

남자하고 여자란 게 그저 만나서 하루 저녁 즐거우면 그만인 걸 귀찮게 사귀고 자시고 할 거 뭐 있나요?(릴리)

 

잃어버린 아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해야했던 댄서의 아픈 마음을 아래 글로 표현했다.

그의 글엔 오히려 그 안에 수국 같은 순수가 담겨있다.

 

‘불행한 게 하도 당연해서 자기가 불행한지도 모를 정도로 불행한 사람.

바로 나예요.

그때 겨우 깨달았어요.

나는 인간 하바리 중에서도 최고 하바리구나 하는 거요.

한 발만 더 떨어지면 짐승이구나 하는 거요.

그게 너무 화가 나서요-

 

“화가 나서, 어떻게 한 거야?”

 

릴리는 목이 메어 가늘게 기침 소리를 내며 뒷말을 이었다.

 

-"다 오라고--• 다 오라고 했어요.”

 

얼굴을 씻는 물소리가 들렸다.

기타무라도 나무 바가지로 물을 퍼 머리에서부터 끼얹었다.

 

“왜 그랬어?'

 

“그따위 알량한 자비는 필요 없어서요.

내가 무슨 거지인가요?

아슬아슬하게 최하바리 인간으로 살게 해주는 그런 자비를 구걸하느니 차리리 짐승이 되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자진해서 말예요.”

 

대학생 중의 하나를 해어진 아들이라고 단정한 것은 릴리의 망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기타무라는 생각했다.

 

하나마츠리

 

목욕탕에서 돌아오던 사람들이 목욕 주머니를 든 채 멈춰 서서 텔레비전 뉴스에 빠져 있었다.

“바보 불나방들"

“무슨 말이 야?"

“환한 곳에 바글바글 모여 있잖아.

저러다 텔레비전에 잡아먹힐 것 같아.”

 

난 아저씨가 정말 좋아

아까 철길에서 한 말 거짓말 아니야

요시이 아저씨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꽃등의 연한 불빛이 달님처럼 은은하게 아저씨의 삐쭉 솟은 등을 비추고 있었다

 

그토록 좋아 하던 동양의 마녀들이 금메달을 딴대도, 아베베가 맨발로 국립 경기장으로 달려 온대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묻지도 않을 거다

‘싫어, 요시이 아저씨 가면 안 돼.’

 

요시이 아저씨가 이상한 사람이라면 오타지마 이치로(주인공 야요이 친부)라는 사람은 훨씬 더,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잖아, 그 사람은 나도 엄마도 버렸잖아.

그런 지독한 짓을 했는데도 아무도 혼내주지 않으니까 요시이 아저씨가 하느님 대신 혼내주러 갔던 거야.

요시이 아저씨,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어떤 것이 좋은가 나쁜가는 많냐 적냐로 정해지는 게 아냐.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요시이 아저씨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도 난 아니라고 말해줄 거야.

요시이 아저씨는 진짜 올바른 사람이 다, 라고.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절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지만 요시이 아저씨는 아버지 대신 엄마 대신 줄 곧 내 부모였어

 

‘미안’

요시이 아저씨는 왜 미안,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걸까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으면서

‘미안하다 야요이’

부어오른 눈꺼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요시이 아저씨는 그 말만 열 번도 넘게 했다.

열 번도 넘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야요이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아, 아저씨. 나, 이제야 알았어.

어째서 아저씨가 그 말 만 하는지, 이제야 알았어

진짜 아버지 대신 요시이 아저씨는 함께 놀아주었다.

매일 밤 목욕탕에 데려가 몸도 씻겨주었다.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때로는 꾸짖기도 했다.

그리고 진짜 아버지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어째서 그렇게 잘해주는지 나, 이제야 알았어.

요시이 아저씨는 외톨이로 살아왔으니까 나를 외톨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거야

외톨이로 보내는 밤이 얼마나 길고 무서운지 요시이 아저씨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

나, 엄마에게 부탁해볼래.

평생 단 한 번의 부탁을 해볼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용기를 내야 해

아무도 할 수 없어

나만 할 수 있는 말이니까

용기를 내서 말을 해야지

야요이는 얼굴을 들고 어머니를 마주보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오늘은 히나마츠리 날이니까 한해 딱 한번 있는 여자아이의 명절이니까 용기를 내야지

졸업식 답사는 가즈에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말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못해

‘나한테 아빠를 줘’

말을 해 버리고 나자 무릎이 풀려 야요이는 다리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엉엉 울었다

제발 부탁이야 엄마

이제 외톨이는 싫어

매일 밤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는 걸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 우면 하나 둘 셋 세다가 화장실까지 단숨에 뛰어 가야 하는 걸.

나 엄마 좋아하는 것만큼 요시이 아저씨도 좋아.

요시이 아저씨도 엄마 좋아하는 것만큼 나를 좋아해

그러니까 엄마도 내가 아저씨 좋아하는 것만큼 요시이 아저씨 좋아해 줘.

제발 엄마.

그것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나한테 아빠를 줘.

항상 함께 있어 주는 너무 좋은 아빠.

요시이 아저씨 같은 아빠를 줘.

 

 

장미도둑

 

​아이 러브 유 라는 말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대신 우리 둘의 사랑의 증거로 헬렌은 돌아오는 스쿨버스 안에서 추잉 껌을 씹고 헤어질 때 그걸 내 입에 넣어줍니다.

날마다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그렇게 해줍니다.

헬렌이 씹은 추잉 껌은 민트 향 대신 달콤한 하이브리드 티 향기가 납니다.

 

나쁜 건 저예요.

헬렌을 유혹한 것도 나지요.

나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잔디를 가로질러 마구 뛰어가 큰 소리로 용서를 빌었어요.

“죄송해요, 미세스 존스 마미를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그저 잠깐의 불장난이었는걸요!'

순간, 시간이 딱 멈춰버린 것 같았습니다~

마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이윽고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와락 주저앉아 울어버렸어요.

“미안해요, 마미 .

나, 착한 애가 될게요.

그러니까 마미도 마음을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그래 , 불장난이었어.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봐.”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봐요.

항해중인 대디에게 그런 소릴 다 하고. 대디도 분명 괴로워하실 거예요."

“괜찮아, 요이치. 엄마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 거야.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게."

'벌을 받을 사람은 나예요.

내가 나빴는걸요.

내가 착한 애였다면 마미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물끄러미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미세스 존스가 갑자기 쓰러진 것은 그때였어요.

“그 사내는 악마야. 저질 바람둥이야."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미세스 존스는 쓰러져버렸던 거에요.

대디, '바람둥이' 란 게 뭔가요?

그리고 '그 사내'(헬렌 모친과 바람핀 주인공 요이치 선생)는 대체 누구일 까요?

헬렌이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집 앞에 와서야 헬렌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언덕길을 내려가 고요히 가라앉은 헬렌 집 정원으로 들어갔지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십 개의 하이브리드 티 화분.

활짝 핀 꽃줄기마다 하트 모양으로 잘라낸 색종이가 한 장씩 매달려있었습니다.

 

돌아보니 황혼에 물든 항구에서 실버 브리즈 호가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예인선을 천천히 이끌고, 하얗고 거대한 몸체가 거울 같은 저녁바다로 천천히 떠나가는 게 눈물 속에 아른거렸습니다.

대디.

내 평생 단 한 번밖에 없을 부탁을 들이주시겠습니까?

만약 태평양 어딘가에서 메이 프린세스 호와 실버 브리즈 호가 서로 만나거든 친애의 경적을 울려주십시오.

내가 연인에게 말하지 못했던 아이 러브 유' 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요.

그런데, 캡틴.

이 슬픈 일요일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뜻밖의 기쁨이었습니다.

하이브리드 티 화분을 안고 집에 돌아오니 맑은 햇빛 덕분인지 우리집 장미도 활짝 피었지 않겠어요?

일찍 피는 레이디 로즈는 물론 더블 딜라이트도, 플레시어스 플라티남도 눈이 깨끗이 씻길 듯한 빨간 꽃을 피웠습니다.

갑자기 피었을 리는 없지요.

그래요, 언젠가 대디가 해준 그 말 그대로입니다.

'슬픈 눈동자에 장미는 피지 않는다'

꽃송이가 탐스러운 화이트 사토, 노란 폴 리카드,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는 새하얀 꽃송이를 기득 매달고 있었습니다.

문의 아치를 장식하는 도르트문트. 담을 덮은 모던 쉬러브

그것만이 아니에요, 뒤뜰의 팬텀 라툴도, 잉글리시 로즈 꽃밭도 모두 활짝 피었습니다.

이층 발코니에서 마미가 몸을 내밀고 외쳤습니다.

"요이치 이제 곧 대디가 오실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