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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생명의 마음(박경리)

by 굼벵이(조용욱) 2019.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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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인 것 같다.

일제치하에서 몰락해가는 귀족의 삶과 사랑을 그린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힘들게 자신의 생각을 열었다.

나는 그녀의 생각에 100%공감한다.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도

한치의 틀림이 없이 나와 꼭 맞아 떨어진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주장엔

나보다 강한 카리스마적 힘을 실었다.

나보다 더 성공했고 경륜도 있으며 학문의 폭도 넓기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량도 못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목의 힘줄로 대신하는데

내가 느끼기에 이분은 가장 바른 길을

가장 강한 톤으로 주장하신다.

그런데도 그런 그녀를 찾지 않는 젊은 후배들이 안타깝다.

반일 따위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철저한 반일/ 극일주의자다.

(반일과 반일본인은 다르다. 그녀나 나나 반일본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 토지를 통해서도 그런 그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을 모르면서 함부로 반일을 논해선 안된다.

혹 반일을 주장하고 싶다면 주장에 앞서 적어도

이분의 글을 통해서라도 기본적인 사상 무장이 필요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우리 도자기에 꽃병이 별로 없다는 것은 꽃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며

생명을 존중하며 연민을 느끼는 마음 탓으로 볼 수 있다

 

​논리의 표현이 언어에 의한 것이라면 논리의 바탕은 보편성과 개념이다

그리고 논리로 반죽해 놓은 것이 합리주의라 할 수 있겠고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삶의 기반을 집중하고 있으며 합리주의의 강점 또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모순이 없어진다면 논리는 완성될 것이며 언어도 피안에 도달 하겠고 절대적인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지만 완성은 끝이며 정지이며 소멸인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서양의 자유 개념으로 적극적이고 전투적이며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 선명함인데 그것은 문명의 승리였으나 문화의 패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상에서 잠시 살펴볼 것 같으면 흰색의 숭상을 들 수 있다.

흰색은 투명한 상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색이며 투명을 보다 뚜렷이 지향해가는 것에는 갓이 있다.

투명하다는 것이 가벼움을 말할 수 있고 가벼운 비상을 연상 시키며 그 경계선이 희미하다

넓은 치마 옷고름 갓끈 그런 것들도 날리는 특성이 있고 날린다는 것은 역시 가벼움과 투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어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비어 있는 것에는 채울 수 있고 채우고 채우며 들락거리는 융통을 뜻하고 그것은 전혀 틀을 형성하지 않는 우주 취향이라 해석할 수 없을까

 

우리들 의상에 나타나는 곡선의 선호도 그렇다

직선의 안정감을 피하고 곡선으로 포용하려는 강의를 기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림의 여백에는 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종소리의 긴 여운 뒤에 오는 정적은 소리의 이어짐을 느끼게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모두가 희미한 상태 경계가 없는 상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도 그것은 희미하다 죽었다 없어졌다가 아닌 돌아갔다 떠나갔다.

그것은 단절이 아니며 이어짐이다

모순을 수용하는 것이다.

잘라내지 않고 토막 내지 않는데서 오는 우주적 일체감 그것은 무한의 흐름이다

인류에게는 일찍이 신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창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은 신이 그 모순 자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인은 집단적 심리에의 경향이 짙다. 그것은 집단에 대한 복종을 뜻하며, 따라서 권력에 약하고 강자 숭배는 거의 생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연약한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생존해가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의 경우에는 생존의 한계를 넘어선 욕망이기 때문에 그것은 왕왕 화약고가 되어 폭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남경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 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잘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 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 인류는 언제 녹아 버릴지 혹은 부딪혀서 깨질지 모르는 빙산을 타고 떠내려가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쓰잘 데 없는 담론으로 삶의 표피만 어루만지고 있는지 모른다

 

멋은 문명이 자아낸 것이 아니며 문화의 소산이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닐까

토지가 끝났을 때 나는 성취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친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제 토지는 영영 떠나 버렸구나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개나리 울타리에 둘러싸인 곳 생명의 소리들이 충만 해 있고 또 숨을 쉬며 억조창생 생명들이 술렁이던 터전

농약 없이 가꾼 뜰이며 밭이며 또 그것들은 나를 먹여 살렸고 서로 참 잘 살았는데 개발 때문에 터전을 잃게 된 것이다

 

​'노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所爲로서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대붕(상상의 새)은 쥐벼룩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고 쥐벼룩은 대붕이 너무 커서 볼 수 없지만 삶의 궤적은 한 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과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부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

 

모든 것은 밖에서 들여왔다.

특히 일본에서 저질의 것을 골라잡아 들여왔다.

백화점에서 줄줄이 서서 절하는 것까지 들여왔다.

그것이 마음이 아닌 물리적인 것이라는 데 불쾌감이 있고 불필요함을 느낀다

 

대체 그렇다면 우리의 불안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머니를 잃은 고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머니인 대지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젖줄인 강물을 보면 알 것이다

어머니는 깊이 병들었고 젖줄마저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냉소로써 변명하고 몸을 사리거나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거울 하나를 얻은 야만인 같이 남의 것을 우러러 떠받들며 후광을 얻으려 하고 또 일부는 뜨내기 장사꾼 같이 북을 치며 질 좋은 상품임을 외치고 있다.

 

일본에 윤리도덕 관념이 희박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쓴다는 것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잔치가 끝난 뒤의 날장구 치는 격이다.

 

지금 지구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간단하게 얘기해서 쓰레기에 싸여 있고 자원은 고갈 일로로 가고 있다.

정부가(정부는 민간 운동으로 발뺌을 하고 있지만) 절약운동을 시책으로 삼았다면 그것은 썩 잘한 일이며 지구를 위해서도 일조를 한 셈이다.

절약운동이야말로 모든 국가가 해야 할 일이며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 시점에서 절약이야말로 인류의 최고 도덕이며 덕목이다.

동시에 인류가 살아남는 통로로서 절실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생명들의 공통점은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 모두 외로운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나 씨앗에 헌신적이라는 것, 그것을 생각할 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 연민은 또한 내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환경오염 풍요함 다망 이게 모두 과다생산 과다소비가 빚어낸 것입니다

시장에 가 보면 가외 것의 시장점유가 필수품을 상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은 거짓의 두 기둥을 박아 놓고 국민을 가두어 왔다

하나는 천조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예요 다른 하나는 현인신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다

 

모든 사물은 모순 위에 존재하며 바로 그것이 균형이라는 점이다

물과 불은 다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어느 한편이 성하면 동티가 난다

 

​자유인은 떳떳함을 먹고 산다

 

​사죄의 문구 때문에 소설가까지 동원하며 법석을 피우는 일본을 한국 땅에 앉아서 바라본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

참으로 가난한 나라로구나.

잘못을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그들.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

사과라는 것도 그릴 필요가 있어 그러는 거지 그럴 필요가 없다면 사과라는 말 자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샤일록' 같이 인색한 장사꾼이 주변의 형편 돌아가는 것을 살피며 저울 눈금 하나 올렸다 내렸다 하는 그깟 놈의 사고 설사 “죽을죄를 졌습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한국사람 참 느슨하고 어리석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나앉은 거지가 도신세 걱정을 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이 얘기는 일본의 경우일수도 우리의 경우일 수도 있다

 

어찌하여 민초들의 깨끗한 피는 번번이 유린 되어야 하며 소수의 사이비들이 나라를 말아 먹고 거덜 나게 하는지, 역사는 정녕 그와 같은 역리의 되풀이란 말인가

​'난 부자. 든 거지' '권도살림'이라는 말이 있다.

난 부자 든 거지는 화려하고 잘사는 것 같은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빚 투성이로 쪼들린다는 뜻이며 권도살림이란 밑돌 뽑아 윗돌 고이고 윗돌 뽑아 밑돌 고이는, 그러니까 둘러 맞추어가며 하는 살림을 뜻하는데 그 말에는 다 같이 비아냥거림이 숨어있다.

 

도대체 시간은 축복입니까 시련입니까 행복입니까 불행입니까

아마도 그 두 가지 모두를 다 가졌겠지요

죽음과 삶 만남과 이별 희열과 절망 그 쌍 칼을 든 진실로 정체모를 그게 시간입니까

 

짐승은 은혜를 알아도 사람은 은혜도 모른다는, 흔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은혜보다 신의라는 말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가 머리 나쁜 사람을 새 대가리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꾸미는 것이 아니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다 고통스럽게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일본은 핵무장을 반드시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미국이나 러시아 기타 유럽 국가들이 원자폭탄을 보유한 것 과는 다르게 그 위험도가 상당히 높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