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2

20020621 홍등가의 거미

by 굼벵이(조용욱) 2021. 2. 13.
728x90

02. 6.21 홍등가의 거미

 

오늘도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엊그제 저녁 HSC, CSC, KJS가 우리 사무실을 찾았다.

교육원에 교육 받으러 왔다가 친정식구들 얼굴 보기 위해 들른 것이다.

안동갈비에서 정겨운 마음으로 술 한 잔 나눈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날도 결국 HSC의 강권에 못 이겨 단란주점까지 따라가고 말았다.

HSC, 그는 K사 주색로비의 최고봉이다.

술집으로 데려 가 술을 먹여 정신을 잃도록 흥을 돋우고 마지막까지 여자들과 보내게 하는 데 귀재다.

하지만 주색으로 흥한 자는 언젠가 반드시 주색으로 망하게 되어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만 교만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첩경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술 앞에, 여자 앞에, 돈 앞에 교만 떨다 삼대를 못가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절제는 그런 교만을 물리치는 최고의 비책으로 겸손의 한 형태다.

 

그렇게 먹고 마셔야 그 사람 괜찮다는 평을 받는 우리네 문화도 정말 한심스럽고 역겹다.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이 호주가요, 호색한들이다 보니 중국의 그런 문화가 은근 스며든 듯하다.

술도 시원찮게 마시면 돈만 많이 낭비하고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적당히 몸에 좋을만큼 마셨는데도 나중에는 먹다 말았다며 속 좁다고 손가락질까지 받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니 마셨다 하면 술이 떡이 되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두뇌가 점점 마비되어 정신을 잃고 아이큐가 한 자리 숫자까지 내려가면 개나 진배 없이 되고 만다.

그 상태에서 벌이는 행각이란 개만도 못한 개망나니 짓이어서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상태에서 같이 술 마신 다른 사람의 진술 따위를 바탕으로 이리저리 꿰맞추어 기억을 더듬다 보면 대개는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수치감이 밀려온다.

인간은 술로 마비된 전두엽을 빼면 개만도 못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음날 점심에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어제의 酒友들을 모아 얼큰한 짬뽕이나 생태탕집을 찾아다니며 덕분에 모처럼 술을 잘 마셨다고 좋아한다.

매일을 그렇게 고주망태로 보내면서...

 

단란주점에 갈 때마다 난 마치 거미줄에 매달린 한 마리 곤충이 된 느낌을 받는다.

곤충이 많이 다니는 골목엔 언제나 거미줄이 처져 있다.

거미는 몸을 감춘 채 기다리거나 마치 꽃인 양 얼룩덜룩한 무늬로 거미줄 한가운데에서 유혹한다.

미련한 곤충이 걸려들면 아무리 큰 놈이라도 거미줄로 돌돌 말아서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어느 한 곳을 물어 마취상태에 빠지게 한 다음 몸 속 진액을 빨아먹는다.

가끔씩 거미줄에 걸린 빈껍데기 곤충 사체를 보면 단란주점에 갖힌 나와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밤이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에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거미줄 같은 덫을 놓는다.

마침내 나 같은 사람들이 저녁을 겸하여 술 몇 잔 마시고 해롱거리며 호기에 차 건들거리다 그 덫에 걸려들고 만다.

술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어둡고 음침한 지하로 빨려들어 가면 예쁜 색시가 끊임없이 술잔을 부딪치며 양주를 먹인다.

 

고글 이펙트(goggle effect)란 말이 있다.

술을 마시면 아무리 박색도 절색으로 바뀐다는 설이다.

하기사 술 취한 개 눈에 사람 흠결이 어찌 보이겠는가!

그런 천하절색이 따라주는 술잔에 영웅호걸들은 속절없이 완전 마취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 시절엔 영웅호걸 흉내를 못 내는 쫌생이들에게는 한 두 잔으로 맛이 가도록 술에 약을 탄다는 설도 있었다.

일단 이성을 잃고 마취상태에 빠지면 카드고 지갑이고 몽땅 날리며 완전히 깝데기 벗기는 건 기본이다.

생각 없이 동물처럼 온갖 추태를 보이다가 진액이 몽땅 빠져버린 다음 날 아침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어제의 일을 복기하려 애쓴다.

그런들 어찌하랴.

카드며 지갑이며 이미 몽땅 날아가 한 달을 거지처럼 살아야 하는데...

하룻밤의 광란으로 인하여 발생한 희생의 대가가 너무 큰 만큼 후회하지 않는 것도 비정상이다.

한 달을 거지처럼 살아도 하루는 황제처럼 사는 게 미덕인 것처럼 자기합리화 해가며 다음에도 똑같은 그물에 걸려든다.

잠자리가 거미줄에 계속 걸려들 듯이...

 

거미들의 진액빨이 수법은 대략 이렇다.

손님이 걸려들면 꽃단장한 그녀들은 계속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손님이 술에 취해 노래나 춤을 추러 나간 사이 한 두 명은 테이블에 남아 술병에 남아있는 양주를 1/4 정도만 남게 하고 손님이 눈치 못 채게 술을 버린다.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붓거나 얼음통에 버린다.

그녀들은 술을 마실 때에도 마시는 척하지만 마시지 않고 안주나 입가심으로 물이나 우롱차 따위를 마시는 척하면서 입에 머금은 술을 물잔에 뱉어낸다.

그리고 물잔의 물과 얼음을 얼음 통에 쏟아 붓는다.

그러면 웨이터가 수시로 나타나 얼음 통을 새것으로 교체해준다.

손님은 저를 생각해서 새것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가무가 끝나고 다시 술좌석에 돌아오면 수 십 만원씩 하는 비싼 양주가 갑자기 확 줄어들었는데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애교를 떠는 색시들 성화에 못이겨 한 두 잔씩 마시고는 술이 떨어졌다며 다시 또 한 병을 주문한다.

그 중 노련한 대빵 언니가 대접을 받는 주빈 곁에 찰싹 붙어 온갖 애교를 떨며 기분 좋게 한 병 더 하자고 충동질하면 대접하는 사람은 울며 겨자먹기로 호기롭게 술을 주문한다.

아니면 이런 내용도 모르는 채 술 취한 객들은 술김에 한병 더를 외친다.

그 때는 그렇게 매상고를 잘 올리는 아가씨가 업소에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그런 사실을 아는 채 그런 행동을 쳐다보고 있으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인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계산대에 서면 놀라 자빠질 정도의 금액이 청구된다.

100만원 단위가 넘는 것은 다반사다.

그래서 난 단란주점 가는 것을 싫어 한다.

난 마지못해 끌려갔거나 접대상 어쩔 수 없이 갔지 한번도 좋아서 간 적이 없다.

그런 줄 알면서도 계속 사람이 다시 모여드는 것은 아마도 곤충이 계속 걸려들어 거미를 먹여 살리듯 일종의 먹이사슬과 같은 것 아닌가 싶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동안 잃은 것은 얼마나 많은가!

건강은 물론이려니와 고귀한 시간, 나아가 존엄성 까지 모두 잃고 궁극에는 직장마저 잃고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이 다 Yes 라고 하더라도 언제든 No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강하고 힘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내 모습이 밉다.

이제부터라도 내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그 바람에 결국 그렇게 굳게 다짐했던 일기도 스킵하고 내 인생의 변곡점을 흐리게 하지 않았던가!

, 도움도 많지만 해악도 많다.

약주와 악주를 가릴 줄 아는 선비라야 진정한 애주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