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6.24 : 낚시
승진을 앞두고는 떨어지는 낙엽조차 조심해야 한다.
어디서 무슨 일로 인해 자신의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기회를 망쳐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21일), 내 운명을 좌우할 직속상사인 H처장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어렵게 마련되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한 치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게 우리 동네 술 문화다.
술 마시고 해롱거리며 범위를 벗어난 행동을 보이는 순간 낙인이 찍힌다.
그 낙인은 순식간에 복도통신을 통해 일파만파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보통 좋은 소문은 감추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나쁜 소문은 날개를 단다.
한 번 낙인이 찍히면 퇴직할 때까지 평생을 따라붙으며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우리회사 건물은 각 층마다 복도 중간에 휴게실이 설치되어 있고 한 층에는 대개 두 개 이상의 부처가 자리 잡고 있다.
그 휴게실에는 커피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고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도 피울 수 있다.
그래서 휴게실은 곰을 잡는지 오소리를 잡는지 언제나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그 속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왁자지껄 각종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 이야기들이 소문이 되어 유선망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복도통신’이라고 부른다.
우리회사 전자통신 설비는 대한민국 최고다.
우리 설비에 별도로 연결된 통신망은 통신회사의 통신설비보다 더 견고하고 안전하며 최첨단설비가 장착되어 있다.
그래서 소문들은 이 최고의 설비를 타고 울릉도든 제주도든 순식간에 파다하게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런 통신망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소문이 인사를 한다는 설도 있을 정도다.
모처럼 만들어진 기회인 만큼 긴장한 상태에서 너무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머리도 아프고 온 몸이 나른하다.
그래도 이번 토요일에 함께 낚시 여행을 떠나자고 작은 애 호신이와 약속해 놓았기에 안 갈 수 없다.
더군다나 RHR형과도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
호신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타에 태워 낚시터가 있는 진천으로 향했다.
여느 때 같으면 차에 타자마자 바로 골아떨어질 녀석이 낚시에 대한 기대와 환상으로 마음이 들떠 잠은 커녕 간간이 노래까지 불러댔다.
논스톱으로 거의 한 시간 만에 진천에 도착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 월드컵 4강 진출을 위한 축구경기가 있다 보니 모두들 TV앞에 앉았는지 거리가 한산했다.
우선 점심을 해야겠기에 음식점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음식점을 찾을 수 없어 그냥 길가 허름한 동태탕집에 들어갔다.
동태찌개 맛은 별로지만 한 상 가득 차려진 넉넉한 반찬들이 시골 인심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한 시간여 뒤에 RHR형 차가 아들 JC를 태우고 도착했다.
그들도 거기서 점심식사를 한 후 4강전 축구를 시청할만한 장소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그냥 그 음식점의 작은 TV로 축구경기를 관람하기로 했다.
연속되는 경기로 선수들이 모두 지쳐 있었지만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 새 주영 아빠도 도착해 거기서 식사를 했다.
축구경기가 연장전에 이어 페널티 킥에서 4강의 신화를 창조하는 순간 우리는 넋을 잃고 흥분해 환호성을 지르며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덕분에 식당 아줌마가 파는 감자도 한 상자씩 사서 차에 실었다.
낚시터 저수지 물 위엔 여러 개의 방갈로가 띄워져 있었다.
낚시터 주인이 운전하는 조그만 배를 타고 예약한 방갈로에 올랐다.
흙 묻을 일도 없고 잠도 잘 수 있는 초호화 낚시터다.
내가 처음 낚시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가서다.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군대생활 하실 때에도 한탄강에서 낚시를 즐기셨다고 엄마에게서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1953년 6.25전쟁이 종전에 가까워질 무렵 소위로 임관해 참전하셨다.
다행히 포병장교여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총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후방에서 지원 포사격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보병으로 나간 친구들은 남과 북이 막바지에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전선에서 대부분 전사했단다.
아무래도 일반 병과 달라서 장교들은 앞장서 지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적군의 표적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 때는 마땅한 직장이 없었기에 전쟁 후에도 아버지는 군생활을 계속 이어가시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965년 무렵에 대위 7호봉으로 예편하셨다.
본인 뜻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 성화에 못이겨 예편하셨다.
한양조씨 직장공 2파 종가의 11대 장손인 아버지는 중병에 시달리는 할아버지의 병수발과 종사 및 집안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예편을 결정하고 고향으로 컴백하신거다.
예편 후 아버지는 가끔씩 인근 저수지로 낚시를 하러 다니셨고 어린 나는 고기 바구니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아버지랑 단둘이 앉아 즐기는 낚시에서 아버지는 붕어가 입질은 어떻게 하는지 언제 낚시를 채야 하는지 찌와 추는 어떻게 맞추는지 따위를 상세히 설명해 주셨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대학교 학창시절엔 아버지에게 배운 실력으로 친구들과 낚시를 자주 다녔었다.
그런데 오늘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7년이 지난 지금 내가 처음으로 초등생 아들을 데리고 낚시터를 찾은 것이다.
향렬 형은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해 왔다.
낚시를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마치 먹으러 온 것 같은 느낌조차 들었다.
낚싯대를 담가놓고 돼지 두루치기와 낚시터 주인에게 주문한 닭도리탕으로 저녁식사를 겸하며 소주를 마셨다.
밤이 깊어지니 무척 추웠다.
몸이 안 좋은 데에다 저수지 한가운데에서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니 더욱 추위를 느낀 듯하다.
그날 밤의 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 낚싯대로 손바닥만한 붕어 한 마리와 자질구레한 붕어 몇 마리를 낚는데 그쳤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낚시에서도 제법 큰 붕어 한 마리를 잡았을 뿐 더 이상 입질이 없기에 급하게 낚시를 포기하고 짐을 꾸렸다.
R형, 주영아빠와 그 자리에서 서로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 집사람이 물고기를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잘 다듬어 정리해 주었다.
어릴 적 우리엄마는 내가 물고기를 잡아오면 비린내 난다며 질색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 집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요리한다.
식당 아줌마한테 산 감자를 넣어 만든 붕어찜으로 저녁식사를 포식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칼칼하다.
전날 몹시 춥더니 결국 심한 목감기에 걸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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