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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4

20040304 먹기 싫은 밥 억지로 먹기

by 굼벵이(조용욱) 2022.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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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4(목)

Z가 저녁을 사러 온단다.

천하의 짠돌이 거지 중의 상거지 Z가 밥을 사러 오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건 아닌지 모르겠다.

함께 가자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난 가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행태는 상상만으로도 나를 전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나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얼굴을 내밀기로 했다.

식사 장소를 맑은 바닷가 나루터로 해 놓았다.

싸구려 횟집이다.

장소를 조금 그럴듯한 곳으로 바꾸라고 했다.

S과장이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 우리 식구가 들어갈 수 있을만한 중국집 룸을 알아보았으나 대부분 예약되어 있어 빈방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그냥 당초에 정한 맑은 바닷가 나루터로 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Z는 OO과장을 달고 나왔다.

나는 S과장에게 이미 그걸 예언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날은 그가 생전 보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러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카드를 꺼내어 밥값을 지불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내일 아침도 해뜨는 방향을 유심히 관찰해 보아야겠다.

식사 후 Z가 노래방을 가자고 했지만 나는 내일 있을 노사협의회가 염려되어 몰래 도망가려 했다.

뒷전으로 처진 채 요리 조리 도망칠 기회를 보고 있는데 Z가 고래고래 내 이름을 불러대며 나의 도주를 막았다.

내가 좋아 함께 하고싶은 마음에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그에게 코가 꿰어 산소 노래방에 내려가 하기 싫은 노래를 두곡이나 불렀다.

 

때늦은 서설이 엄청나게 내려 온 도시가 어느새 하얗게 변했다.

12시가 다 되어 가므로 열차 떨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삼성역으로 뛰다시피 걸어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