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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4

20040404 추억여행

by 굼벵이(조용욱)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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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4(일)

전주 콩나물 해장국집이 유명하다고 해 거기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먹어보니 정말 전주식 그대로 하는데 먹을 만했다.

엄마가 전화를 해 10시까지 성당에 데려다달라신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부지런히 본가로 향했다.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 내외를 성당에 모셔다 드렸다.

성당에 간 김에 근처에 위치한 모교 안중국민학교에 들렀다.

학교는 그동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교사 앞 화단에 위치했던 고목 벚나무가 베어져 나갔고 새로운 교사가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무로 지어졌던 교사는 콘크리트 교사로 모두 바뀌어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안에서 어렴풋이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널빤지에 검정 콜타르를 발라 지은 교사동은 완전히 사라지고 멋진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지만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는 그대로 있다.

울타리로 사용했던 측백나무도 아직 예전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 나무들이 정말 반가웠다.

그 나무들은 아마도 내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멋지다.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올망졸망 얽혀있다.

40년 전에도 예뻤는데 지금도 그렇게 똑같이 예쁘다.

일부러 학교를 한바퀴 빙 돌아 구석구석 추억의 냄새를 맡았다.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하다.

아래 교사동에서 위 교사동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경사면에 파릇파릇 올라오는 작은 싹들이 보였다.

드문드문 울타리 사이로 개나리가 삐쭉 내밀어 인사를 한다.

차를 타고 안중시내를 돌았다.

옛날에 아버지가 근무하셔서 자주 들렀던 지서 건물을 지나 김혜경 아버지가 하는 동양사진관 건물 앞을 지났다.

그 골목은 아직 40년전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단지 상호가 얄궂은 다방이나 싸구려 선술집으로 바뀌었을 뿐 건물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봉아지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수촌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웬 아주머니가 내차를 세웠다.

급하게 교회를 가야하는데 대워달란다.

그녀를 교회 앞까지 데려다 주고 덕우리 길을 천천히 달렸다.

대학 시절 찬숙이랑 둘이서 별만 들어찬 깜깜한 밤길을 걸었었는데 그 길이 지금 이길인 듯하다.

지금은 대부분 숲을 걷어내고 밭을 만들어놓아 보기에도 흉하다.

따뜻한 봄 내음을 맡으며 천천히 차를 몰아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세월이 너무 오래 흘렀는지 예의 찬숙이네 집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한번 찾아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냥 돌아서 신포를 돌아 집으로 들어왔다.

증조부 산소를 거쳐 할아버지 아버지 산소를 성묘한 뒤에 쇠주로 향하는 수로를 따라 들길을 걸었다.

수로에 고여 있는 물에는 우렁이 몇 마리 외에 송사리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성철 할아버지 댁에 들러 병문안을 한 뒤에 집으로 들어갔다.

봄기운이 취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엄청난 봄기운이다.

잠시 눈을 붙이려 누웠는데 엄마가 성당 미사가 끝났다며 집으로 데려가 달라는 전화를 했다.

작은아버지 내외분과 엄마를 모시고 들어오는 길에 병천 순대집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인 후 서울로 향했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치 통 두개를 꺼내어 차에 싣고 집사람이 부탁한 간장과 도토리 묵 앙금도 함께 실었다.

주머니에서 5만원을 꺼내어 어머니 손에 쥐어 드리고 차를 몰아 서울로 올라왔다.

다행히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