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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9

20090303 경영자의 독선이 곧 경영이라는 생각은 금물

by 굼벵이(조용욱) 202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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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노사협의회나 단체협약 회의가 있는 날은 마치 노조 잔칫날 같다.

이날만큼은 회사 간부들을 상대로 노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인정한 날이다.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용인된다.

아니 합법성을 벗어난 이야기도 모르는 척 용인된다.

그러니 사용자 측 입장에서는 그날만큼은 상대적으로 제삿날이다.

그동안 노조가 마음속에 담아왔던 각종 불만이나 불편사항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사장을 비롯한 회사측 간부를 마음껏 조져대는 날이다.

그런데 신임사장 성질이 불같아서 그 꼴을 견디기 힘들거란 예측이다.

그런 날 공연스레 잘못 걸려들어 개망신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게 우리 같은 회사측 참모들이다.

개 잡는 날 마당 끝에서 떨고 있는 강아지나 다름 없다.

이날 노조는 사장을 조지기 위해 작정하고 수개월 동안 사장의 잘못된 행적을 조사해 온 것 같다.

ACT, TDR이다, 6시그마다 하면서 내 놓는 사장의 새로운 경영기법들에 대하여 그동안 노조는 불만이 쌓일대로 쌓여왔었다.

노조는 작심하고 듣기 민망할 정도록 사장의 신경영 기법을 조져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한전인들은 노측이든 사측이든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다.

노조는 김사장의 LG경영스타일이나 잭웰치 따라하기에 한전인의 자존심을 짓밟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새로 부임하는 사장의 주문을 남다른 충성심으로 열심히 이행한 죄밖에 없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비효율이나 잘못된 경영으로 비하하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방법만이 최고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장의 독선에 대한 질타다.

'당신이 주장하는 요란한 경영도 임기인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또다른 신임사장에 의해 똑같이 부정되고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사장을 몰아붙인다.

사장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오로지 경청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한사람 한사람 돌아가며 모든 노조측 질타를 새겨들었다.

그리고는 '나는 회사에 아는 사람도 정치권에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오로지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 내 경영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임을 알아달라'는 주장을 했다.

회사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과 정직성을 믿어달라는 주문이다.

사장의 계속되는 측근 특별채용에 노조가 제동을 걸자 자신의 정직성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정직성은 자신만이 인정하고 주장할 뿐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어 입증이 곤란하다.

어쨌든 어제는 사장이 노조로부터 심하게 당한 날이었다.

아마도 사장은 이번 기회를 통하여 한전 노조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노조가 아님을 명확히 인식했을 것이다.

동시에 노조만도 못한 회사 측 간부들의 논리적 열세를 마음속으로 지탄했을지도 모른다.

노조의 사장 공격에 한마디 대꾸도 못하는 회사측 간부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는 노조만도 못한 회사측 간부들의 부족한 실력을 탓했을 것이다.

지난번에도 그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불만을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사용자측 위원들은 노조가 주장하는 해당 업무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어서 논리적 대응이 불가능할 뿐더러 공격하는 입장과 방어하는 입장은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열세적 입장을 면하기 어렵다.

노조는 자신들의 논리가 먹히지 않으면 떼 법으로 우기고 목청의 크기나 욕설로 상대방을 압박하는데 사용자측 위원이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점잖게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한전의 사용자측 위원이다.

난 솔직히 한바탕 신나게 맞붙어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하다간 오히려 사장으로부터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작용하다보니 사용자측 위원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장은 백기를 들고 조합원에 대한 ACT 전면보류를 지시했다.

2주 내에 재검토해서 노사협의를 거쳐 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노조는 기가 살아서 기타 토의시간에도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것들을 몽땅 토해내며 밀어붙였다.

회의가 끝나자 노조는 승전고를 울리며 13층 노조 사무실로 유유히 사라졌고 회사 측 위원들은 씁쓸한 심정으로 각자 자신들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장 앞에서 전무도 권위를 잃고 조인트 까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저녁에 TDR 보고를 위해 벽치기 자료를 검토하던 중 임청원 부장의 전화를 받고 일식집 소야로 갔다.

임부장과 백부처장이 처장과 함께 위로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장과 술 한 잔 나누면서 이런 저런 회사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돈으로 밥 먹을 땐 회사 이야기만 하라는 사장 주문대로 회사 이야기만 한 것이다.

백부처장이 조합원에 대한 ACT교육을 중단했는데 간부는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댔다.

마침 ACT를 진행중인 사업소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간부는 계속 시행해야 한다는 답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중간에 나서 그건 아니라고 했고 교육생 40명 가운데 직원이 33명이고 간부가 7명이라면 간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하고 간부도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처장은 즉시 내 의견을 받아들여 전무님께 보고를 드린 후 간부도 중단하겠다는 결론을 내려 이를 전 사에 지시했다.

정작 교육이 필요한 직원들에게는 시행하지 않고 간부에게만 강요하는 ACT는 이제 더 이상 혁신 스쿨로서의 명분을 잃었다.

그것이 명분을 가지려면 적어도 노조를 설득할 수 있었어야 한다.

노조의 주장이 옳다고 받아들여 보류를 지시했다면 당연히 간부에게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조합원만도 못한 간부를 만드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것은 결국 혁신이 아니라 간부에 대한 능멸로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중간에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았다면 두번 세번 망신당할 뻔했다.

이로서 김쌍수 사장의 시대에 뒤떨어진 요상한 경영기법 ACT는 망신만 떨고 막을 내렸다.

2주 내 어떤 결론이 나올지 모르지만 이미 그는 노조에 무릎을 꿇었다는 오명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경영자의 독선이 곧 경영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라는 교훈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