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1007 북유럽 여행기

by 굼벵이(조용욱) 2024. 7. 20.
728x90

[여덟째날(10. 7)]

Goreleven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호텔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만 했다.

그곳은 현지 독일인 운전사도 잘 모를 만큼 외진 곳에 있다.

스웨덴의 forsmark 방폐장 갈 때와 유사하게 끝없이 반복되며 펼쳐지는 산과 농장과 작은 마을들을 지나 지루할 정도의 버스 여행이 계속되었다.

이번 연수 스케쥴을 어느 분이 잡았는지 모르겠다.

공부도 좋지만 전국 각지에서 고생하는 나이 지긋한 노조 간부들을 불러다 고생을 너무 심하게 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공부 욕심이 많으시고 연수와 여행을 확실히 구분하고 싶어 하시는 우리 김명수 처장님이 스케쥴 작성에 관여하시지 않으셨나 싶다.

평생에 처음 갖는 7, 8일의 해외여행 일정 중 3, 4일을 시골 산골짜기 해변가에 위치한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돌아다니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를 가이더의 통역을 빌어 재해석된 내용으로 공부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앞으로는 그런 공부는 조금 지양하고 외국 문화의 실상을 좀 더 풍부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Itinerary를 다양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말 특이한 것은 시골길인데도 도로 옆에 자전거 도로가 나란히 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내게 참으로 특이한 발상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이들을 모방해 시골에도 자전거 도로를 많이 개설했다.)

가이더는 독일의 전기검침에 대하여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유럽 4개국은 전기요금을 년 단위로 계량한다고 한다.

각 수용가 별로 전기 설비용량에 따라 표준 사용 계약전력을 설정하여 매월 정액제로 요금을 지불하고 매년 1년에 한번 검침하여 정산한다고 하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그는 또 독일 사람들의 말 키우는 방법에 대하여도 말해 주었다.

말 사육에 비용이 많이 드니 몇몇 사람들이 공동으로 출자해서 농부로 하여금 말을 키우게 하고 회원제로 말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독일인 운전사도 몰라 물어물어 도착한 방사성폐기물 처분 연구소는 인적 없는 깊은 산 중에 있었다.

그렇다고 높은 산과 골짜기가 있는 그런 산이 아니고 거의 평지에 가까운 산림지역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우리를 맞은 마이어 박사는 아인쉬타인과 비슷한 얼굴에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다.

그는 우리를 끝으로 지난 79년부터 24년간 종사해 온 방폐장 연구원 생활을 접고 정년을 맞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감회와 의미를 느끼는 듯했고 무언가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하여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설명했다.

가이더가 독일 대학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을 만큼 나름대로 학문적 배경도 있어 거의 완벽한 통역을 구사하였다.

Gorleven은 주민이 600~700명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인데 1960년대부터 원자력발전을 이용해온 독일이 60년대 중반부터 종말처리장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던 중 지층구조가 두꺼운 암염으로 되어있는 이 지역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79년부터 본격적인 지층조사를 했다.

암염구조가 폐기물 처분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4곳을 천공하여 지층을 확인한 후 방사성 폐기물 처분 연구소와 함께 방사성 폐기물 중간 저장소를 건립하였다.

어느 정도 깊이의, 어떤 조건을 갖춘 곳에 폐기물을 저장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연구의 주된 방향인데 지금 이곳에 두 군데의 지하 갱도를 파 저장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 연구만 하고 있을 뿐 폐기물이 저장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Site #1은 지하 990 미터 깊이 까지 파 내려갔으며 Site #2840 미터 깊이 까지 파 내려갔으며 방사성폐기물을 저장 할 수 있는 준비는 완비되어 있다고 한다.

연구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중간저장소가 건립되어 있는데 11월 중에 방사성 폐기물을 담은 12개의 컨테이너가 수송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때 환경단체에서 몰려들어 매우 시끄러워지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연구소와 중간 저장소 울타리 주변에 빙 둘러 컨테이너 박스가 도열되어 있는데 그것은 환경단체의 데모를 막기 위하여 경찰들이 기거하는 숙소로 쓰이는 곳이라고 했다.

승마경찰과 경찰견도 데모 방어에 함께 참여한다고 한다.

북부 독일은 상당히 두꺼운 암염 층을 구성하고 있다.

암염은 지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특성(100만년에 20미터 정도의 융기가 일어난다고 함)과 틈새를 막아 밀폐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방폐장에 적합하고 열전도율이 매우 좋으며 가스를 차단할 수 있고 가공이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염분이 물에 녹는다는 단점도 있다.

지난 79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암염의 특성이 과연 방사성폐기물 저장에 적합한 지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해오다 지난 200010월부터 일단 연구를 중단하고 독일 연방 지역 내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암염 이외에 다른 광석을 이용할 수 있는지 연구해 보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 지금은 갖추고 있는 시설물에 대한 유지 보수만 하고 있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마이어박사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점심으로 감자와 돼지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점심 식사 후 중간처분장에 들러 처분시설물을 견학하였는데 그곳은 철저하게 보안 통제를 하고 있어 카메라를 포함하여 소지품 일체를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견학 도중에 일군의 작업단을 지휘하던 한 간부가 나타나 우리를 인솔하던 홍보담당 직원에게 와서는 작업에 방해되니 빨리 끝내고 가라며 퉁명스럽게 이야기 하는 바람에 조금 위축되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저장고 내부를 관람하였고 비행기 유리창처럼 생긴 타원형 유리 벽을 통하여 처분장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를 컨트롤 하는 기계설비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방폐장을 나섰다.

방폐장에서 나와 하노버로 가는 길은 계속 시골길로 이어지다가 아우토반과 합류하였다.

낮 시간에 경험한 아우토반의 트럭들은 모두 포장 이사 트럭 같은 덮개를 하고 있었으며 화물칸이 오픈되어 있는 경우를 하나도 볼 수가 없어 가이더에게 물으니 그런 차량은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안전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작은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서 가이더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매우 정()적이어서 만나는 가이더마다 이것저것 개인 신상에 관한 것까지 캐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어렵고 힘들게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국에 대한 강한 애착심도 있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죽지 않고 살려는 강한 의지도 있다.

이인자 가이더는 스웨덴 시청사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중국인 여행객을 보고 중국 가이더를 불러 혼내기도 했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대뜸 한국인의 위대성에 대하여 하나하나 예를 들어 주장하던 표은복 가이더도 그렇다.

내가 명함을 직접 주고받지 않아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 하지만 독일의 이 가이더도 훌륭한 한국인 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보철강에 입사하였으나 불운한 시기에 회사 부도와 함께 나와야 했다고 한다.

인천공항공단의 하청업체인 조명회사(활주로 조명은 일반 조명과 다르다고 함)에 근무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정리하고 독일로 넘어왔단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닥터 라벨답게 자존심이 무척 강하면서도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는 근면파로 독일 사람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독일 가이더인 그가 분석한 독일 통일의 이점은 이렇다.

우선 독일 통일 후 50만 군대가 28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군대가 줄어든 만큼 군비가 줄어들고 남는 군비는 다른 경제성장의 동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에는 25만으로 축소될 예정이며 장기적으로는 징병제(1년 의무복무)에서 모병제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NATO 동맹으로 외세의 침공을 막을 수 있어 더욱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고 일본, 중국, 러시아를 연맹으로 하는 동맹군을 결성하면 미국도 두렵지 않은 군사 강대국의 반열에 끼게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주장도 곁들였다.

나는 통일에 관하여 잘 모르지만 일시에 갑자기 통일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50년이나 100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져야 한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step by step)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통일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며 생색내는 그런 정치인도 없어야 한다.

대부분의 부작용은 항상 성급함에서 나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며 도끼 들고 소한테 덤비다간 소에 받혀 죽기 십상이다.

살살 어루만지며 하루에 1미리씩 파 내려가도 얼마 안 가 소는 아무런 통증도 못 느끼면서 뿔을 떨어뜨리게 된다.

서두르다간 소도 사람도 둘 다 죽을 수 있다.

스웨덴의 시의회나나 웁살라 성당의 경우와 같이 이들은 성당이나 집을 지을 때도 수십 년 수백 년간 대를 이어간다.

그렇게 지은 집이어야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다.

외국에 나가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서 올 일이 아니고 그런 정신부터 배워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우리는 어둠이 밀려오는 7시 즈음에 하노버에 도착하였다.

내일이면 여행이 끝나는데 연수 일정에만 급급해 그동안 잘 다녀오라고 촌지를 준 사람은 물론이고 내 일을 맡겨 놓고 와 나 대신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할 선물 하나 마련할 시간이 제대로 없었기에 모두들 마음이 불안했다.

도심의 백화점 앞에 풀어 놓고 충분하게 시간을 주어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자기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독일이 물가가 싸니 독일에서 맥가이버 칼 따위를 선물로 사는 것이 좋겠다는 오은진 처장님의 주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조했다.

우선 가이더에게 상점이 문 닫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해 놓도록 하였다.

우리가 들른 상점은 각종 주방 기구와 칼을 파는 가게였는데 칼값이 그리 싼 편은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칼도 10유로 이상 주어야 했다.

자그마한 쌍둥이표 칼과 감자 까는 칼이 하나의 세트로 들어 있는 것이 원래 10유로 이상이었으나 7유로로 디스 카운트하여 세일 중이어서 그걸 선물용으로 다수 구매하려 했으나 매장 내에 7개 밖에 없었다.

여직원에게는 그걸 주고 남자 직원들에게는 작은 맥가이버 칼을 하나씩 주기로 했다.

선물을 구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므로 모두들 왕성한 구매력을 보였다.

유로화와 달러화가 혼용되고 Tax Refund 관계도 있어 복잡해지자 주인이 계산을 못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충동구매에 불이 붙으니 걷잡을 수가 없다.

가이더는 예외 없이 거기에서도 주인과 마지막 계산(?)을 위해 10여분 간 밀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한참 어려웠던 시절 간호사를 독일로 수출할 때 간호사로 와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강릉 아주머니가 운영한다는 서울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마침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반찬으로 제공된 데다 외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이었으므로 가지고 간 팩 소주를 모두 꺼내어 멋진 만찬 시간을 보냈다.

주인아주머니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하노버까지 집단으로 연수를 온 우리가 너무 반가워 함께 술을 마시며 좋아했다.

그녀의 말로는 하노버시 전체에 한국인이 150명 정도 산다고 한다.

그녀를 대동하고 독일 정통 맥주 맛을 보기 위하여 우리가 찾아간 곳은 PAULANER라는 상호를 가진 맥주집 이었다.

김명수 처장님께서 한 잔 내신다고 해 그곳에서 남길 만큼 풍족하게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강릉 아줌마의 권유에 따라 돼지 족발을 시켰는데 거기는 돼지 족발을 삶는 것이 아니고 기름에 튀겨서 내왔다.

기름에 튀기니 껍데기가 나무껍질처럼 단단해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종업원과 함께 사진 촬영도 해 가면서 흑맥주와 일반 맥주를 각각 한 조끼씩 마셨다.

서울집 아줌마는 모처럼 다수의 한국인을 만나자 그동안 못다 한 수다를 한꺼번에 털어내려는 듯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호텔로 떠나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에 영월화력 직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에게 애착이 갔던 모양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며 지금쯤 고향인 강릉에 가서 살고 싶어도 한국 경제가 너무 급성장을 하는 바람에 아파트 하나 장만할 돈조차 없고 남은 것이라고는 늙은 몸뚱아리 하나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재산 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이 어렵던 시절 산업 역군으로 머나먼 이곳 독일까지 와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상대적인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니 섭섭할 수밖에.

matrim airport hotel은 지금까지 경험한 호텔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었다.

엘리베이터조차 자기 룸키를 이용하여야 하며 자기 층 밖에는 갈 수가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장익상씨가 전화를 해 호텔 바에서 한잔 더 하자는 연락을 했다.

호텔 바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나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합류했고 허충범 위원장이 술을 가져다주는 여종업원에게 감사합니다하면서 그 말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는데 갑자기 바에서 함께 일하던 독일 총각 녀석이 우리 자리로 와서는 웃으면서 독일어를 씨부렁거렸다.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마침 그 자리에 가이더가 함께 앉아있어 그 말의 의미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말은 아주 심한 욕의 하나로 너희들을 뒤로 따 먹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가이더가 그를 다시 불러 그가 한 말의 의미와 손님에 대한 모욕을 지적하자 그는 무릎을 꿇듯이 가이더 옆에 앉아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한잔에 3유로 하는 고급 칵테일을 한 잔씩 서비스하겠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은 화가 나서 거절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가 의도를 가지고 모욕한 것이 아니고 철부지 젊은 아이의 장난기가 발동하여 무심결에 한 말이고 정중하게 사과까지 하는데 이를 받아줄 줄도 아는 아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부분 나의 의견에 동조해서 사과의 의미로 준 칵테일을 모두 마셨다.

가이더 말로는 만일 우리가 그의 언행에 대하여 호텔 측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는 그날로 직업을 잃게 된다고 한다.

나는 그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사나이답게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정신을 높이 샀다.

허충범 위원장은 바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여행 중에 다른 사람이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 남을 비하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례도 많았다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자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 상견례 때 내가 부탁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외국에 나오면 갑자기 개인주의적 사고가 지나쳐 불협화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여야 하고 그들의 문화에 맞게 남을 위해서 배려할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 > 2003'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31008 북유럽 여행기  (0) 2024.07.20
20031006 북유럽 여행기  (0) 2024.07.20
20031005 북유럽 여행기  (2) 2024.07.20
20031004 북유럽 여행기  (2) 2024.07.20
20031003 북유럽 여행기  (5) 202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