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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교양고전독서 (노명우)

by 굼벵이(조용욱) 2025. 4. 1.

지난번엔 어느 철학 교수님(김진영)이 아도르노를 집중 분석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자신이 강의한 노트를 책으로 엮어낸 건데 쉽지 않은 발상이다.
너무 소중한 글이어서 강의 챕터 하나하나 마다 모두 정리해 내 블로그에 남겼었다. 
그걸 내 자산으로 만들어 언제든 회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어찌보면 그 교수님이 가진 전 재산이다.
교수란 대저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밑천인 지식을 책으로 엮어 공개해버리면 팔아먹을 자산이 없어 궁색해지거나 또다른 자산을 축적하느라 개고생을 해야 한다.
나도 해봐 아는데 개고생을 해서 축적한 지식이나 기술을 강의나 책으로 발간해 버리면 일면 뿌듯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다른 지식이나 기술의 축적이 필요해 더욱 심한 개고생을 해야 한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좋은 글 좋은 책은 세상에 나오기 어렵다.
그런데 노명우 교수는 그걸 감수하고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난 이런 류의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게 소수 엘리트 지식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을 보고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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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공자가 출연한 시기에, 헬라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인도에선 석가모니가 나타납니다.
놀라운 동시대성 아닌가요?
동양과 서양에서 축의 시대를 연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는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글로 남기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지닙니다.
축의 시대를 연 사상은 제자 문화 시대를 통과하며 글로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스승을 대신하여 제자들이 글로 스승의 생각을 기록하는 시대를 제자문학 시대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학은 영어로 리터러처인데 이때 리터러처는 좋은 의미로 시와 소설이라는 뜻이 아니라 글로 쓰인 것의 총체라는 뜻입니다. 
 
모든민족은 종교를 갖고 있고 엄숙한 혼례를 거행하며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다.
모든 민족에는 그들만의 유피테르와 그들만의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이 있다는 것이다.
 
민중이 타락하면 본성적으로 제약 없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치, 유약함, 탐욕, 질투, 오만, 허영 등의 노예가 되고 방종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가장 비천한 노예들에게나 어울릴 거짓말, 사기, 비방, 절도, 비굴, 위선 등의 모든 악행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힘주어 강조했던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에 대한 가능성 지적을 이미 비코가 했다는 셈이지요.

'새로운 학문'은 오래된 책이지만 이런 점에서 현대의 어떤 책보다 새롭습니다.
현재 인류는 과거의 인류보다 일견 발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대량 살상 무기조차 기술 없는 야만의 상태에선 만들 수 없는 문명의 산물이에요.
그런데 그 무기가 사용되는 바로 그 순간 인류는 야만으로 되돌아가겠지요.
후퇴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야만으로의 후퇴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그 가능성을 우리가 각성하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만 코나투스를 갖는 것이 아니라 코나투스가 모두의 것이 될 때 야만 경보기는 상시 작동할 테니까요.
만하임은 지식인은 특정한 당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부유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유명한 지식인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폴라니에따르면 사회는 변화하는데요.
변화의 방향은 인간 외부의 어떤 초자연적인 법칙에 의해 정해지는 게 아닙니다.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지요.
인간의 선택이 사회 변화의 특정한 방향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이 어떻게 누적되느냐에 따라 사회의 변화는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저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 모두를 위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사회 과학의 임무입니다.
폴라니가 볼 때 사회과학은 사회가 올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삶이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결정이 내려지도록 개입해야 합니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차 대전 이후 나치즘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죄를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는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법률 위반 행위인 범죄입니다. 
형벌은 범죄를 지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형식이지요. 
전범에 한정됩니다.
두 번째 형태는 만약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범죄의 직접 행위자가 아니더라도 범죄를 저지른 국가의 국민은 국가의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독일 국민은 포괄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국가의 법죄에 연루되어 있는 한 모든 국민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가 저질러지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려 놓아야는 원상회복이라는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는 도덕적 범죄도 있습니다.
도덕적 범죄의 심판은 양심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가 있었다면 명령에 따른 것이라 해도 그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은 속죄와 쇄신이라는 요청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네 번째 형이상학적 죄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아서 어떤 일이 발생했다면 발생한 그 일에 대해 형이 상학적 죄가 있다는 것이에요.
(작위의 무작위?)
나치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나치를 막는 행위를 하지 않아 나치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면 그 행위하지 않은 사람은 형이상학적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기나긴 혁명'에서 개인이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를 기준으로 윌리엄스는 인간을 구성원, 신민 혹은 하인,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 유형으로 구별합니다.
구성원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을 긍정적으로 동일시 하는 인간입니다.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일반화된 범주화를 과잉 범주화라고 합니다. 
과잉범주화가 되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편견은 과잉 범주화를 먹고 자랍니다. 
방향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항상 의심하고 회의하죠. 
사유는 기본적으로 의심과 회의로부터 출발을 하고 끊임없이 의심과 회의를 잘하는 사람이 성숙된 사고를 할 수 있죠 
반면 폐쇄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뒤집는 증거가 나와도 요지부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편견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편견의 재생산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다지려는 편견 선동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져 유포되기도 합니다. 
나치를 예를 들어보죠 
편견의 선동자는 누구였을까요. 
히틀러였죠. 
그리고 괴벨스였습니다. 
그들은 편견을 선동함으로써 구체적인 이득을 얻었습니다. 
권력을 얻었고 권력을 유지했죠. 
사회 정치적 변화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집단 반발을 백래시(backlash)라고 하는데요. 
여성주의에 대한 백래시집단을 분석해 보니 이들은 매우 강한 편견의 소유자임이 드러났습니다.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지성의 힘으로 나의 욕망이 나의 것이 아니라 매개된 욕망임을 깨닫는 것이죠. 
욕망이 다차원적으로 매개되어 이중 매개화가 펼쳐지는 상황 속에 내가 놓여 있음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욕망이 중계되었음을 아는 것, 중계된 것이기에 허영과 속물성이 끼어들 가능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 지성적 능력이죠.
지성은 욕망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깨닫도록 돕습니다.
지성은 타인을 향하던 욕망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도록 돕습니다.
지성을 통해 욕망의 출처를 알게 되면 번민을 가져다주는 욕망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 방법이 희미하게나마 보입니다.
허영심으로가득 채워진 시간이 잃어버린 시간이었다면 잃어버린 시간의 출구에는 되찾은 시간이 있습니다. 
되찾은 시간은 자만심의 죽음이고 겸손의 탄생이며 또한 진실의 빛을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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