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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사랑에 미처 날뛸 날이 올 거다. 김수영의 비원(황규관)

by 굼벵이(조용욱) 2025. 3. 11.

이 책이 내겐 참 어렵다.
김수영의 시가 어려워서인 때문일 거다.
500페이지 가까운 책 속에 빽빽히 들어찬 문장들을 정독하기 너무 힘들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때론 설렁설렁 이해한 척 넘기며 읽어야만 했다.
그래도 내 마음에 안착하는 몇개의 싯구들이 있고 내 멋대로 해석할 수 있어 좋다.
감히 내 짧은 소견으로 이 위대한 시인과 저자를 논할 수는 없어 몇가지 저자의 소견과 나를 감동시킨 김수영의 싯구 몇개 적어본다.
(나의 유치하고 짧은 소견은 괄호 안에 담았다)

진보주의는 옛 것을 폐기 처분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근대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죠.
(저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으나 요즘 우리사회 진보는 옛 것을 되살려 자신들의 세확장에 이용하려고만 든다.
말은 진보정당이라고 하지만 퇴보를 지향하는 셈이다.
예를 들면 죽창가를 부르며 일제시대의 아픔을 되살려 자신들의 세확장의 도구로 활용하려 할 것이 아니라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일본과 협력해서라도 일본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이 진보의 기본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100년 전의 분노만 기억하는 것은 100년 후 세대들의 분노만 초래할 뿐이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임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난 이게 김수영의 마음 속에 새겨진 한으로 느껴진다.
625 전쟁 때문에 죽은 줄 알았던 시인 대신 잠시 친구가 거둔 아내를 못마땅해 하는 자신의 비열한 속내를 드러내는 듯하다.
자기자신으로 표현되는 '움직이는 비애'가 얼마나 컸으면 쏟아지는 비에 견주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관념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산다.)

여기
햇빛에는 겨울 보리에 싹이 트고
강아지는 낑낑 거리고
골짜기들은 평화롭지 않으냐
평화의 의지를 말하고 있지 않으냐

(이건 한폭의 수채화다.
난 차라리 이런 싯구가 좋다)

시간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이 또한 아내의 부정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금이 간 너의 얼굴...
그의 아내가 이 시를 읽고 얼마나 아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
(아주 큰 물결은 절대 거스를 수 없다)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부정한 아내를 용서하는 듯하지만 끝내 앙금을 남긴다는 생각이 든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이제야 아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우리가 책으로만 배웠던 역사가 과거지사만은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무엇입니까?
부모님 이야기만 잘 새겨 들어도 우리의 현재가 얼마나 깊은 질곡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지 확연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이런 말을 드리는 것은 기술문명에 미혹된 탓인지 우리는 너무도 쉽게 과거의 시간을 잊고 사는 것 같아서입니다.
최소한 100년 전부터 100년 후 까지 현재에 함께 사는 연습이 우리에게는 필요해 보입니다.
(100년 후를 본다면 100년 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쉽게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은 100년 전만 기억하려 든다.
더군다나 진보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이 더 그렇다.)

봄은 오고 쥐새끼들이 총알만한 구멍의 조직을 만들고
풀이 이름도 없는 낯익은 풀들이 풀새끼들이
허물어진 담 밑에서 사과 껍질보다도 얇은
시멘트 가죽을 뚫고 일어나면 내 집과
나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들렸다 놓인다.
요는 정치의 의견이 맞지 않는 나라에는 못 산다
(요즘의 진보와 보수간 정쟁과 비슷한 당시의 정쟁 형국을 묘사한 것 같다.
거반 100년 전 우리는 이로인해 전쟁까지 겪었는데 똑같은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생각의, 이념의, 사상의 진보는 없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반드시 먹어보고야 똥맛을 아는 인간의 속성을 담았다)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
이 죄에는 사과의 길이 없다 봄이 오고
쥐가 나돌고 풀이 솟는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역사의 큰 틀에서 보면 100년 후 사람들에게 우린 사기꾼으로 치부 될거다.)

시는 그것이 누구 것이든 연역해 읽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되풀이 읽은 경험 위에서 공통한 점을 발견하는 것이 읽기와 비평의 기초입니다.
비평은 별도의 전문가 영역이 아닌데 우리는 비평을 비평가의 몫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평은 모든 읽기에 내재해 있는데 말이죠.
우리는 읽으면서 본능적으로 비교해서 평가합니다.
그래야만 작품의 어떤 것이 내면화되지 이 과정 없이 우리는 다음 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만약 비평에 다소간 심리적 거리를 두려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훈육을 하려는 비평문화 때문입니다.
또는 전문가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 영역을 쌓고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이 비평의 포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간혹 보이는 이른바 대중적 글쓰기는 비평을 감상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한편으로 지성의 포기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위계화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에 대한 반권력은 또 다른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자꾸 쪼개는 과정 자체에만 있을 뿐이며 이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에서 생기기 마련인 자기 권력을 동시에 허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난 이 시가 자조적 관점으로 읽혀진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받아들이겠다는 항복의 글로 여겨진다.
더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냥 바람따라 물결따라 살겠다는 표현 같다.
저항시인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어서 이 시를 읽는 나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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