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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사생활의 역사

by 굼벵이(조용욱) 201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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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는 문명화의 과정이란 공권력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복종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유태인으로 나찌의 광기를 직접 경험한 그이기에 

그가 그런 시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거나 국가의 공권력이 문화나 개인의 사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가족은 사회적 계약관계였었다.

따라서 결혼이나 가족 따위가 요즘과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아이는 계약을 맺어 내게 필요한 사람을 입양하면 되는 것이고

따라서 혈연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왕이 양자출신이라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왕이 될 만큼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양자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도 국왕이 되어 철인정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대에서 양자 왕위계승 제도가 깨지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지만 사람이 국가의 중요 자산이기에 국가가 출산은 장려하였다.

그러나 요즘같은 일부일처제의 의미는 희박했었던 것 같다.

가족은 하인이나 노예 따위가 모두 포함되었고 

모든 가족이 공개된 집안에서 공동생활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말 따위의 가축도 집 안에서 함께 지낸 것 같다.

(공중 목욕탕, 광장, 극장, 여론재판의 습속을 이해하면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난잡하고 무절제한 쾌락주의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출현으로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은둔, 고독을 찾게 되고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며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다.

중세에 접어들어 이태리를 중심으로 사생활에 눈을 돌리면서

자신만의 울타리를 갖게 되고 캐비넷 따위의 가구 개념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캐비넷은 사적인 물건을 넣어두는 공간이지만 방과 같은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세 말까지 기독교의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중심으로 개인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생활의 문화가 점진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유형의 가족개념세에 들어서야 정립되었고 

1930년대 이후 미디어(라디오, TV)의 발달과 더불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현대는 지나치게 사적 자유를 추구하면서 가족개념이 위기를 맞고있다.

결혼 보다는 동거를 선호하고 자녀나 출산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졌다.

최근 인터넷의 발달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역사라고 하는데

사적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미래사회는 어떤 모습을 띄게 될지 궁금하다. 

지금의 가족관은 아마도 우리세대에 끝날 것 같다.

다음세대에서는 국가가 공권력을 발동하여 강요하지 않는 한 

아마도 결혼이나 가족의 개념이 사라질 것 같다.   

다시 로마시대 이전의 가족개념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