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재산제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원래의 자연적 순박함과 선함을 상실했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민주시민이 되어 일반의지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공동의 이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절대적 자유를 향유해야 한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살고 있다.
시민들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노예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각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공동의 힘으로 지키고 보호하는 결사의 한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문제인데 사회계약이 일종의 해결책을 준다.
타락한 사적 개인을 사회적인 정신을 지닌 시민으로 만들 때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다.
개인의 의지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공익의지로 공적인 자아를 만드는 주체이다.
이 공익의지가 공동선, 시민정신 즉 일반의지로 연결된다.
다른 하나는 사적의지(특수이익)로 개인적인 욕망과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일반시민이 일반의지에 근거하여 법을 직접 만들고 그 법을 준수하는 자기입법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사회시스템이다.
주권이 일반의지와 분할되어 행사되는 순간 사적의지(특수이익)로 전환된다.
따라서 도덕성을 갖춘 시민으로 하여금 일반의지를 통해 권력이 사적의지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공익과 공동선을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과 교육을 통해 사적의지가 일반의지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일반의지는 올바른 정보와 적절한 계몽, 그리고 다수가 동의하는 좋은 근거를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인간의 궁극 목적은 사적의지의 실현이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도로 실현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 국민의 재산과 생명의 보호이다.
이는 개인의 공익의지로 행사된 주권의 합 즉 일반의지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통치자는 반드시 일반의지의 범주 안에서 그 권력을 행사하여야만 한다.
법에 복종하는 인민이 신민이다.
법을 만드는 주체로서의 인민이 시민이다.
신민과 시민은 동일체여야 한다.
이를 자기입법의 원리라고 한다.
즉 시민이 직접 법을 만들고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의제가 과연 루소의 자기입법 원리에 충실한지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주권은 본질상 일반의지 안에 존재해야 한다.
대의원은 시민의 고용인일 뿐이다.
그런데 의원이 선출되는 동안에만 시민이 자유롭고,
의원으로 선출된 순간부터 시민은 노예로 전락한다.
정당도 어찌 보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 특수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단체다.
루소는 시민종교를 통해 동질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양심을 가진 일반의지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가치관은 고착된 것이 아니고 변화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자연에는 수많은 자연법칙이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삶의 지혜이고 교육의 대상이다.
시민들이 이러한 자연교육과 시민종교를 통해 동질적인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개별적 공익의지가 모여 일반의지로 굳어지면서 자기입법의 논리에 따라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면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으로 돌아가 가장 자연스런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루소(1712 ~ 1778)는 나보다 25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오늘날의 나와 너무도 흡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의 생각지도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이상사회는 만들어질 수 없다.
생각이 다른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사는 것처럼 이상적이고 완벽한 삶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상적인 생각지도는 자연법칙에서 그 전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지도는 교육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루소가 살던 시대는 종교가 개인의 가치관이나 인격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적 역할을 했었기에
그는 시민종교를 통한 교육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육수단이 매우 다양하다.
아직도 종교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나 가족 사회를 통한 유아기 교육이다.
학교교육도 매우 중요하며 아이들이 자연법칙을 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
매스 미디어만큼 중요한 교육수단도 드물다.
아프리카나 중동의 분쟁지역도 무기로 해결할 일이 아니고
유아기 교육으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교육수단은 차고 넘친다.
세계 지도자들은 무기나 경제에 혈안이 되어있지만
정작으로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교육이다.
올바른 시민교육만이 지구를 전쟁 없는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
이 시대에 루소가 태어났다면 아마도 나와 같은 주장을 했으리라 확신한다.
내가 좀 과한 생각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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