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er는 원래 ‘옷감 짜는 사람’이라는 의미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할아버지는 옷감 짜는 기업가였고 아버지는 국회의원 출신이다.
부유한 부르주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세속적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의 극명한 가치관의 차이 속에서 살아온 삶이
그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1864년에 출생하여 13세에는 ‘독일 역사발전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논문을 쓸 만큼
천재성을 지녔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를 포함한 많은 사회 사상가들이 법학을 공부했듯이
그도 188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1894년 그의 나이 30세에 freiberg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큰할아버지 딸과 결혼했지만 그녀와는 평생을 지적 동지관계로만 살았다고 한다.
1896년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기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이어가지만
1897년 부친 사망 이후 심각한 신경쇠약증으로 6년간 모든 지적활동을 중단한다.
그의 신경쇄약은 자신과의 말다툼 끝에 집을 나간 아버지의 객사를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생긴 것이지만 근본 원인은 아마도
상반된 부모의 가치관 속에서 자아 정체성이 견고하게 확립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190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직을 사직하고 미국을 방문하여 발표한 논문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보고 그는 ‘만일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당 관료제로 갈 것이다’라고 하며 관료제에 대한 우려를 표하였다.
1909년 사회학회를 창립하였으며 다른 여자와 사귀면서 여성해방론적 관점을 가지기도 했다.
1911년부터는 종교 사회연구에 몰입하였는데 특히
유교, 불교, 도교, 힌두교, 유대교 등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1917년에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발표했고
1920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요즘 같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병으로 희대의 천재를 잃게 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6년간의 투병생활과 지적활동이 어려운 상태에서
초인적으로 치열하게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착안한 사항은 ‘기업가, 자본가, 고급 숙련노동자 그리고 기술적, 상업적 훈련을 받은
전문요원들은 압도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많았다는 것’과
‘16C 초반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경제적으로 발전한 도시 대부분은 프로테스탄트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층은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다수든 소수든 경제적 합리주의를 지향한 반면
카톨릭은 언제나 같은 방식을 주장할 뿐 변화가 없었다.
그는 초기 개신교와 근대 자본주의 정신 간에는 무언가 내적 친화성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란 초기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지닌 특성으로
직업을 가지고 체계적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근검절약, 근면, 계산적, 계획적, 신용, 절제, 천직 따위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천직(Beruf : 종교적으로 신이 나를 부름)이란 하늘이 내려준 직업으로
카토릭에는 없는 종교적 의미가 내포된 직업관이다.
이 말은 Martin Luther(1483-1546)가 숨어서 성경을 번역하면서 의도적으로 넣었다고 한다.
루터는 원래 법학을 공부했으나 친구가 갑자기 사망하자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고 한다.
교황청이 면죄부를 팔자 95개조 반박문을 만들어 ‘정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하면서 신앙에 있어 내적 경험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루터는 제국국회에 참석해 농부는 농부대로 부름을 받았고
각자 다른 책임 영역이 있을 뿐 도덕상의 위계차이는 없음을 주장하였다.
모든 신자들이 성직에 있어 평등하고 양심과 신념에 따라 신앙하며 각 개인이 하고 있는 일 즉 직업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에 카토릭으로부터 암살위협을 느낀 그는 숨어서 성경 번역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영주와 상공인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그 결과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와 같은 갈등의 결과 30년 전쟁(1618-1648)이 발발했고 결국 프로테스탄트의 승리로 끝나면서 교정 분리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교황청은 결국 정치적 일선에서 물러나 설교나 기도만 하게 한 것이다.
그의 천직개념은 캘빈(1509-1564)의 구원예정설(예정조화설)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
구원예정설은 신의 의지로 이미 예정된 구원을 인간이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존재하며 전능하신 신의 의도는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다.
각 개인은 구원 받은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 의무가 있고,
세속적인 활동이야말로 자기를 믿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행위이므로
체계적인 세속적 노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세속적 노동은 최고의 금욕수단이며 신앙질서의 가장 확실한 증명이고
세속적 노동의 결과 사업이 번창한다는 것은 구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속적인 노동을 통해 부유해지면 더욱 열심히 세속적인 활동을 이어가며
신이 나와 함께 한다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동안 감각적이고 주술적이었던 문화를 혐오하게 되고
일상생활에 금욕을 실천하게 되었다.
베버는 이를 ‘세계를 마법에서 해방시키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를 계기로 탈세속적인 종교적 귀족주의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이와 같은 개신교 윤리에서 기인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투자와 무한경쟁은 쇠창살의 우리에 사람들을 갇히게 한다고 보았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천직에 토대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개신교의 금욕주의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하니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사람들도 이 경쟁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고
끊임없는 이윤창출 노력과 경쟁은 쇠창살의 우리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교는 개혁이나 변화의지가 없이 현세를 긍정적으로 보며, 힌두교는 현세 도피적이고,
유대교는 강력한 심정윤리로 보편적 윤리로 이어지질 못해
결국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구에서만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데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가 일반화되어질 수는 없지만
‘사회과학자는 강을 볼 때 현재의 달빛을 이용해 그 강이 흘러가는 줄기를 순간적으로 바라볼 뿐’
이라는 탈코트 파슨스의 이야기처럼
한 시대가 지나면 다른 방법론으로 봐야겠지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베버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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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행정학 공부할 때 늘 거론되었던 베버를 만나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관계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지금 마음에 지니고 사는 소명이나 천직관이 500년도 더 된
15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니 나는 한낱 개미만도 못한 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전을 대할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요.
그는 자본주의의 발달은 결국 직업관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거죠.
직업을 천직으로 보는 관점이 성장의 모티브 즉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고 보는 겁니다.
천직관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나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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