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장소가 비슷한것 같은데
지난번에 올 때만 해도 정거장 이름이 정수장 후문이었는데
기사님은 정문이라고 우깁니다.
덕분에 차는 정거장을 지나쳤고
우리는 일어나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맘씨 좋은 기사님 조금 가다가 중간에 내려줍니다.
간절히 원하고 실행에 집중하면
그 안에 늘 기적이 잉태되어 있다는 말을 실감했지요
(별것 아닌 걸 넘 거창하게 표현했나요?)
시호루트 입구는 바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답니다.
고맙게도 등산 로드맵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구요.
예의 그 토종닭과 칠면조 오리 거위가 한데 어우러져
한가로이 배나무 밑에서 신선놀음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요놈 한마리 어떻게 해볼거라고 첫새벽에
무릎 높이도 안되는 찌그러진 철망넘어 주인장을 찾았다가
남의집 담장을 마음대로 넘었다고 된통 얻어터진 후
산에 오르기 시작했지요.
.
이번엔 우리본부 음유시인 정한효 차장이 함께 했습니다.
선배님들 노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꼽사리낄 수 없겠냐는 제안에
등산에 연령제한 인원제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좋다고 했더니
다녀와설랑 보기 좋게 어우동 동참기 시 한 수 풀어 놓더군요.
영변 약산 진달래는 아니어도
간밤에 떨군 진달래꽃 살포시 즈려밟고 남한산성으로 오릅니다
.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오늘의 행복을 축복합니다
바리바리 싸온 짐들을 풀어놓습니다.
김원장님 꽃감 정말 맛나데요.
가이더 답게 김실장님이 스틱으로 가리키며 주변 지역을 설명합니다.
김실장님이 파프리카를 내오고 장사장님이 가방을 뒤적거립니다.
장사장님 배낭에서 드디어 화제의 커피가 나옵니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향기에 취해 염치 불구하고
나만 한잔 더 훔쳐마십니다.
초록이 더욱 짙어집니다.
삶은 조화와 상생입니다.
신갈나무도 산벚나무도 모두 함께 살아야지요...
오지사장님의 자태에서 삶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정한효 차장님 덕에 순간 순간 많은 현장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화재 현장입니다.
이거 제때에 진화 못했으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바로 옆에 154KV 철탑 2기가 있었거든요.
나무든 사람이든 사랑이 최곱니다.
사랑은 생성의 에너지로 만물을 소생하게 하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파안대소하고 있네요.
웃음도 생성의 에너지가 작동하지요.
벌봉까지 가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침밥 제대로 안자시고 오신 김진기 원장님의 허기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표정은 일부러 지으려 해도 어렵지요.
순간포착의 즐거움입니다.
일단 두부김치와 야채를 안주삼아 막걸리로 허기를 달랩니다.
양파가 피를 맑게하는 최고의 건강식이란 말에
모두들 양파와 마늘쫑에 손길이 갑니다.
이거 남겨 가면 마눌에게 혼나니 무조건 다 드시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이젠 벌봉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찍고 찍히는 순간을 찍는 장면도 연출됩니다.
원래 산성과 개보수된 산성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아직 꽃잎을 매달고 있는 산벚을 배경으로 어우동 골수들이 환하게 웃고있네요.
꽃과 시인과 함께하는 즐거움도 있구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산성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젠 머리에 된서리가 내려 빠르게 노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힘겹게 살아온 지난 날을 반추합니다.
허옇게 늙어가는
내 머리칼을 바라보던 오지사장님이 넌지시 한마디 합니다.
"조박사, 이젠 염색 해라."
평상시 잊고살았던 내 머리칼을 사진으로 보니 백발이 성성합니다.
"이젠 더이상 거부하지 말고 그냥 염색해"
그 말 한마디에 서글프지만 집착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주관 보다는 객관이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원시 그대로의 토성은 마치 내 흰머리카락처럼 서서히 허물어져가고 있습니다.
언젠간 인공이 가미되며 이런 아름다운 앤티크 스타일을 찾아보기 어렵겠지요?
사라지기 전에 얼른 한 컷.
이번엔 벌봉 꼭대기에서 한 컷 합니다.
처음 가보는 벌봉에서 다섯이 옹기종기 정상을 찍습니다.
The Three Musketeers
정 시인도 한 컷
돌 틈 사이에서 어렵게 이어온 생명도 환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장사장님이 들깨 칼국수와 막걸리 그리고 도토리묵에 메밀 전으로 산행을 마무리하십니다.
전깃줄에 참새가 앉아있듯 버스 정류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립니다.
그네도 한번 타보고...
방금 점심식사를 마친 음식점 앞에서 이별을 아쉬워합니다.
2014년엔 이곳 남한산성을 더 자주 찾아 꼭 살을 빼야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나 염색해야 할까봐..." 했더니
"왜, 내가 하랄 땐 그렇게 안한다고 하시더니...?"
라며 비아냥거린다.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말에 힘이 빠진다.
그날 저녁 아내는 내 생전 처음으로 못난 내 머리통을 맘껏 주물렀다.
그렇게 색깔을 까맣게 바꾸어 놓았는데도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
.
괜히 염색했나...?
어쨌거나 또다른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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