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0년 마침내 흉노마저 굴복시킨 한 나라는 서역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의 비단이 로마까지 팔려 나갔다
'Japan'은 칠기를 의미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종교개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 역사가 펼쳐지게 된것은 단연코 그의 인쇄술 덕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결국 서양과 동양이 역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누가 먼저 만들었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운용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
중국 조선 일본 가운데 조선에만 서점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서양에서 책은 중세를 붕괴시키고 근대로 나가는 데 기여했지만
고려와 조선의 책은 중세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도구였던 셈이다
조선과 일본은 똑같이 쇄국 정책을 폈고 결과적으로 외세에 눌려 개방해야만 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을 따라 잡고 극복하기 위해 유럽에 사찰단을 파견하고
자신들의 모델로 강소국 네덜란드를 선택하여 난학을 세웠지만
조선은 형식적인 유람단에 만족했고 체계적인 벤치마킹에 무관심했다
그 차이가 20세기 양국의 처지를 완전하게 갈라 놨다
일부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150년 동안 1억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이 전파한 각종 전염병, 학살로
300만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모두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콜롬버스의 꿈을 지핀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1254~1324)
무엇보다도 아시아에 엄청난 금은보화가 있다는 내용이
잔인한 약탈과 학살의 항해시대를 열게한 원인이 되었다
16세기에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일대 육 내지 팔이었지만 유럽에서는 일대 12였다
유럽에서 금 1 kg 을 12 kg으로 바꿔서 중국에 가져오기만 하면
1.5배 내지 2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니 그 자체로 매력적인 거래였다
게다가 중국에서 금을 구입하여 유럽에 가져다 팔면 수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은은 물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하는 화폐인 동시에 하나의 상품이었던 셈이다
유럽인들은 남미에서 약탈한 은을 가지고 중국에 와서 엄청난 양의 물품을 구매했다
1543년 중국 해적선 한척이 명나라 닝보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규슈의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에 닿게 되었다
이 배에 탔던 포르투갈인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영주인 다네가시마도끼다카는 이들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배 안에 있던
명나라 사람과 필담을 나누다가 그 폴투갈인이 가지고 있던 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키다카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엔의 거금인 2천냥을 주고 두 자루의 총을 입수했다
그는 곧바로 스기노보라는 장인에게 총의 기능과 제작법을 배워 모조품을 양산하게 하였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다
조총이 일본에만 전해지는 건 아니었다
1550년대를 전후해 중국의 명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조총보다 대포에 집중했던 터라 그 작은 무기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조선 역시 중국처럼 방어위주의 국방전술을 택했기때문에 화포 중심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5년경부터 대륙 침략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
대마도주에게 조선을 침공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중간에 샌드위치 신세였던 대마도주는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해 대마도주가 파견한 일본 사신이 오만하다는 이유등으로
엉뚱하게 일본정벌론 같은 강경론만 들끓었고 통신사 파견은 결국 좌절되었다
임진왜란당시 왜 육상에선 대패했는데 해상과 해안에선 대승했을까?
물론 이순신의 지략이 큰 힘을 발휘했지만 무엇보다 그 전쟁은 대포와 조총의 대결이었고
육상에 비해 방어적 개념이 더 강한 해상 전투에서 화포 특히 대포의 위력이
조총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은과 총이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었다.
근대정신의 핵심은 자유로운 개인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경제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문장을 인용해 보면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까지 많은것을 가정 하면 안 된다
혹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마라
이말은 쓸데 없이 실재를 늘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무엇인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하여 설명해야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마침내 지동설을 따르면 훨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복잡한것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음을 알았다
본질을 보는것이 리얼리티 의 진정성이다
강한 프랑스에 대한 무모한 집착과 비이성적 위기감이 드레퓌스 사건을 만들었다
악은 언제나 위기에 처할 때부터 발호하게 되어 있다
(정치는 삶이고 삶은 철학이다라고 저자는 주장 하지만
나는 인문학이 종교가 철학이 삶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전체주의는 인간의 무사유로 인해 발생한다
기소 독점권을 가진 검사는 자신이 기소한 사건의 결과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
무죄 평결이 난 건에 대해서는 감점을 받는다
그것은 기소 독점권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 장치다
사안이 심중하거나 그런 기소건이 누적 되면 인사 상 불이익을 받는다
유혹은 강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강한것은 자기 삶에 대한 신념과 가치관이며 철학이다
이렇게 힘들게 얻어낸 자유와 독립이니 만큼 네덜란드인들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부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이런 자유는 다양한 분야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학문의 자유도 철저히 보장해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유명한 철학자를 배출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자유의 갈망과 관용이 만든 나라였다
우리가 네덜란드의 오렌지 색깔을 볼때 진정 읽어 내야 하는 가치는 바로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네덜란드가 17세기 유럽의 인쇄중심지였으며 그것은 바로 관용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인쇄한것은 베네치아였다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 가운데 베네치아가 가장 번성했던것도 그런 기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인쇄술의 발달은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인쇄의 중심지가 베네치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동 했다
그것은 탈 지중해시대의 강력한 지식드라이브 정책 덕택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관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자연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따라왔다
네덜란드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책들을 찍어냈다
왜 네덜란드가 외국어로 된 책들을 엄청나게 인쇄하게 되었을까
다른 유럽 국가들은 검열이 심했다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과 정보가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기때문에 지배층은 늘 긴장할수밖에 없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전처럼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지 못한다는것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믿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것은 바로 관용의 힘이다
네덜란드는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피보다 더 아끼는 국토를 스스로 파괴하면서까지 지켜 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들의 자유도 존중할 줄 알았고
공존의 지혜를 모색했다
네덜란드의 힘은 바로 거기에서 성장했다
세계의 4대 유일신 종교 가운데 가장 나중에 생긴것이 이슬람교라는 점에서 가장 현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상대적으로 꽤 관용적인 편이다
한 손에는 칼 한손에는 꾸란이란 말은 목숨걸고 꾸란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는것이 옳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무슬림을 무어인이라고 하는데 섹스피어의 희곡 주인공 오셀로가 바로 그 무어인이다
이들이 1492년 그라나다의 나사리 왕국이 완전히 축출될 때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관용적 태도에 있었다
당시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코르도바는 인구 50만명의 엄청난 규모로
이슬람 세계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모스크들 뿐 아니라 수많은 화려한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당시 코르도바의 도서관에는 수만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배운 제지술 덕분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국가들과 프랑크 왕국을 비교해 보면
문명 수준이 무려 400년쯤 차이가 난다고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었을까
이슬람 문화는 로마에서 배척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했고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들을 양성했다
만약 그런태도가 없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고
유럽의 근대화는 그만큼 더 늦게 개화되었을 것이다
카톨릭 세력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무려 800년간 투쟁을 하며 노력했다
국토 회복이라는 뜻의 레콩키스타가 바로 그것인데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국토를 회복하려는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에스파냐는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잔혹한 종교 재판을 여러 차례 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고추방했다
이전의 관용은 사라졌다
유대인들이 떠났다
더불어 지식과 자본도 빠져나갔다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는 선교사를 대동하면서 선교와 무역을 동시에 해결하려 했지만
네덜란드는 오로지 무역을 목적으로 일본과 교류를 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문화와 체제를 혼란시킬 수 있는 종교 같은 위험 요소를 갖고 있지 않은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로서의 가치가 확실했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와의 독립 전쟁을 통해 종교적 관용을 체득했고
무역만이 자신들이 살길이라는것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경제 활동에만 집중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쫓겨나 암스테르담으로 온 유대인들은
인도에서 채굴해온 다이아몬드를 보석으로 만들어 유통하였는데
이들이 대부업에도 나서서 금융업까지 발전시켰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차별하지 않는 관용적 태도를 보여
유대인들과 그들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 무역을 위해 동인도 회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네덜란드가 이처럼 경제 활동에만 전념하고 실제로 일본에서 독점적 지위를 얻게 된 것은
현실주의적 태도와 관용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와 싸워 독립하였고 강력한 왕정보다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 세력이 일찍부터 발전했기때문에 독립심과 자부심이 강했다
실제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가치를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먼저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보통사람들의 초상이 그려졌고 자의식의 발로인 자화상이 많이 그려졌다
중세와 달리 근대에 들어와 자화상이 많아진것은 근대정신의 핵심인
자의식이 강하고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화가 자신이 스스로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신의 사회적 역할 등에 대한
성찰이 깊어졌다는 것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하기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렘브란트가 네덜란드인이었다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왕족 교회 귀족들은 주로 자신들의 가계를 과시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미화하는 그림 그리고 성화를 주문했다
그들은 정물화나 풍경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특이하게도 17세기에 이미 정물화와 풍경화가 많이그러졌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일상이나 동인도회사처럼
자기 회사가 자리 잡은 지역과 진출한 곳의 풍경을 그려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시민계급의 새로운 요구였고
네덜란드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예술적 정체성을 인식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는 일찌감치 정물화와 풍경화 뿐 아니라 풍속화까지 등장했다
17 세기에는 다양한 부유한 시민계층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새로운 미술 작품 구매자로 떠올랐다
그래서 이전처럼 특정한 미술가를 후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구매자가
각자 취향과 요구에 맞는 작품들을 구입했던 것이다
이들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했는데 가정집은 물론이고
가게와 정육점에도 그림을 걸어 놓을 정도였다
미술의 시장 구조가 바뀐 것이다
'레이스 뜨는 여인'은 가로 세로가 20센티미터에 불과한 아주 작은 작품이다
이처럼 네덜란드 미술은 서민의 일상 생활 속에 녹아들었다
바니타스란 라틴어로 헛수고 거짓 쓸모없음 허풍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바니타스 정물화는 주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교훈을 담고 있는 그림들이다
그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것이 해골 유리잔 책 촛불등으로
이것들은 세속적인 삶이 짧고 덧 없음을 상징한다
독일 태생의 네덜란드 화가인 피테르 클라스는 정물화의 대가였고
바니타스 정물화와 아침식사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그는 그런 그림들을 통해
인간의 허영심때문에 악이 생기는 것이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표현했다
네덜란드의 대표적 철학자로 스피노자가 있다
유대인( 나중에 그는 유대 공동체를 스스로 탈퇴했다)이었던 그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합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신의 무한한 계속성 일종의 범신론적 태도
(신은 그 자체로 자존하는 실체일 뿐 아니라 자연으로도 해석된다는 태도)로
신을 바라보는 철학적 바탕을 마련하였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그 정신에 감정과 지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그 근원이 바로 자기 보존에 대한 욕구라고 보았다
이성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을 토대로 진실의 존재방식을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진정 참된 인간의 삶을 실현할 수 있다는 독특한 합리론을 구축하였다.
보편적 질서와 합리성에 대한 성찰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나타났고
죽음의 불가피성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적 가치관이 욕망의 허무함에 대해 늘 경계하도록 했던 것이다
자연히 화가들도 죽음에 대해 성찰했고 그런 죽음을 전제로 한 삶에 대한 태도가 그림으로 표상되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각자가 제 목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같은 목적아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화합하는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셰일 가스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그리고 저장량으로 따지면 중국이 최대다
그러므로 향후 에너지 판도가 어떻게 변할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세일 가스는 미국의 패권시대를 1세기 가량 더 지속시킬지도 모른다
미국은 기존의 영향권에 에너지 파워까지 갖춰 절대 강국으로 부상할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뜻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를 알아야 한다
강력한 러시아라는 비전에 갇힌 푸틴으로서는 무엇보다 세계 에너지 구도에서
미국과 중국으로 쏠리게 될 힘의 변이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에너지 판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 유럽 파이프라인이
우크라이나로 바뀐다면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서방의 자금이 우크라이나의 채굴에 흘러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그대로 유럽으로 공급하게 된다면
적어도 에너지 문제에서 러시아의 위상은 대폭 축소된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접수하여 우크라이나를 자신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유럽 국가들도 계속해서 러시아의 가스 공급에 의존하게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던 것처럼 무력으로 침탈하는 건
엄청난 저항을 불러올것이 뻔하고 그렇게 되면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될 수 있으니
친 러시아 세력을 움직여 합법적인 주민투표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은 크림 반도의 러시아 귀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셈이다
푸틴의 크림 반도 도박은 그렇게 성공했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는 늘 전쟁을 낳는다
그러나 전쟁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낳는다
크림 전쟁이 유럽에서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의 실마리가 되었고
러시아에서는 근대화로 전환할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던것처럼
전쟁은 끔찍하지만 그 과정에서 억압과 왜곡의 사슬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전쟁은 마치 태풍과도 같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듯
전쟁이 지나간 폐허의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재창조된다
강대국은 오직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접수에서 보듯 어느 누구도 결코 제 뜻대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강대국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것을 역사는 생생하게 보여 준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때 시경의 한 구절을 읊어서 넌지시 그것을 전달하는 관행이 있다고 한다
바로 賦詩言志 즉 시를 건네 마음의 뜻을 전하다라는 말이다
두보의 시는고사를 인용함에 있어 흔적이 없어서 언뜻보면 자작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출처가 있다
바로 두보가 시성이 되는 까닭이다
정약용에게 특별한 습관은 바로 초서였는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베껴 쓰고
그 구절을 따서 글을 짓곤 했다
내가 쓰는 방식과 같다
정약용은 저항시인 두보를 흠모했고 두보의 시를 빗대어 詩作함으로서
우회적 저항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정약용은 바로 두보의 시에 호응하는 시를 지음으로써
두보의 시선으로 당시 조선의 사악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시를 지었던 것이다
도자기는 일반 찰흙으로 만드는 도기와 자토로 만드는 자기를 일컫는 말인데
도기는 섭씨 500에서 1100도에서 구워지지만 자기는 1200도가 넘어야 구워지기 시작해서
1300 도쯤 될때 최적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런 온도를 만들어 내려면 가마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한 기술을 고려청자가 해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나라에서 문화가 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두보가 반군에 잡히고 정약용이 유배지로 쫓겨간것처럼 김수영 또한 영어의 몸이었던것은
가볍게 볼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실제로 김수영의 시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것은 바로 그 포로 수용소 체험이었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각 시대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한 인물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런 절박한 시대적 요구와 맞닿아 있다
현대인은 고독의 기회를 놓치며 살고 있다
아이고 어른이고 가릴 것 없이 고독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고독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그건 고립과 엄연히 다르다
그걸 분별하지 못하니 자꾸만 무의미한 무리짓기에 혈안이 되는 것이다
무리짓기가 무의미한 게 아니다
무의미한 무리짓기가 문제다
기꺼이 고독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만나고 성찰하며 나의 삶을 조율할 수 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김홍도의 씨름도는 그가 그림에 일부러 장난친 것이다
그 잘못된 부분을 찾기 위해 꼼꼼하게 봐야 할 것이다
'내 그림 드문드문 보지 마셔'라는 작가의 그런 의도가 담긴 장치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사기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데 있다
화가들은 원근법에 의거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렇지 않다
관점이 여러개다
이 그림에는 무려 세개의 시선을 바탕으로 그렸다
그러니 사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건 사기라기보다 위대한 천재성이고 또한 그런 천재성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심성이다
오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바로 서양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만의 기발한 재주입니다
대부분의 그림은 위를 여백으로 남겨둔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그와는 정반대로 상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다
주인공인 씨름꾼은 바로 정면에서 같은 높이로 그렸다
그래서 생생하고 당당하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위에 사람들이 몰린것은 구경꾼들의 표정을 통해 씨름판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정면 얼굴로 다양한 표정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씨름꾼과 달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닌가!
표정은 그려야 하겠고 크기는 작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내려다 보면 된다
추사는 세한도에서 그림을 마치고 인장을 찍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나는 그대의 그 마음 오래도록 있지 않았니 않겠네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그런 뜻이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등은 상달 즉 12월에 지켜지던 세시풍속이다
그러나 추석은 9월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추석 행사를 가락국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추석이 한반도의 남쪽에서 따르던 세시풍속 명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빙고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왕실의 장례를 위해서였다
임금의 무덤인 능을 만들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그런데도 금세 만들지는 못하므로 임금의 장례는 대개 100일 정도 걸렸다
그동안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석빙고의 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얼음 위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임금의 시신을 보관했던 것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흐르고 습도가 높아지는것을 막기 위해서 미역을 준비했다
그래서 그 미역을 국장미역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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