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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0610 정권교체의 희생양

by 굼벵이(조용욱)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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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6. 10

점심식사를 하는데 Y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한다.

우리 전무님의 사표가 곧 수리될 것 같으니 밀려있는 전무님 결재사항이 있으면 실기하지 않도록 빨리빨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마치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후에 전무님 방에 가고 싶었지만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꾹 참았다.

처장님도 부장회의를 다시 소집하셔서는 우리 전무님은 물론 H부사장, P OO본부장 모두 사표가 수리될 예정임을 말씀해 주셨다.

평소 우리본부와 우리처를 그토록 미워하더니 K사장이 권한을 남용하여 지나친 행패를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든 보전하려고 자신의 책임을 아래로 돌린 채 파리 목숨처럼 날려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난번 1직급 발령 때에도 자기 직무권한이라며 자기가 직접 사인하여 발령을 내놓고는 1직급 발령을 잘못 내었다며 여기저기 우리본부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고 이미 아래로 직무권한을 위임한 2직급 이하 6직급 직원 인사이동까지 자신에게 사전 보고하도록 일일이 간섭해 놓고는 그 모든 책임을 우리본부에 뒤집어씌우니 관리본부장인들 견딜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는 결국 6직급까지 모든 인사를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말과 같다.

그는 OO팀장 직무대행 J를 3직급으로 만들라는 억지 요구까지 했었다.

아무리 사장이라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규정을 위반할뿐더러 극심한 승진 정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원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아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런 것은 아닌가 싶다.

아니면 또다른 정치적 음모가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믿고 과연 누가 소신 있게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잠시 후 전무님께 이메일을 띄웠다.

이메일 내용의 전문은 이렇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립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Y팀장으로부터 점심 식사시간에 전무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기가 막혀 무어라 할 말을 잊었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전화를 걸어 우리 전무님도 빽이 없어서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해 주었는데 Y팀장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정말 이 나라 이 회사가 원망스럽습니다.

아직 정년도 채 도래하지 않았고 임기도 이제 1/3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전무님을 정치적 논리로 그렇게 비정하게 처우한다면 법도 원칙도 없는 나라이며 그것은 또한 이 회사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전 믿지 않겠습니다.

비록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 조용히 기도하면서 내일은 다른 좋은 소식이 올 것을 믿겠습니다.

눈물이 먼저 터져 나올 것 같아 전무님 방에 가지 않고 그냥 우편으로만 전무님을 만나 뵘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혼자 울분을 삭히고 있는데 전무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무님은 아직 우편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C부처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전무님은 내게 이임사를 준비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지금 돌아다니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되물으니 그렇다고 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으므로 그걸 참느라고 목구멍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목울대가 아프다.

투명하리만치 순박한 눈망울을 가지신 전무님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사무실로 올라와 나는 이임사를 준비하였다.

이임사의 내용을 이렇게 썼다.

 

離 任 辭

사랑하는 OO가족 여러분!

만남과 헤어짐이 비록 하늘의 뜻이라지만 여러분과의 만남은 제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에 여러분과의 헤어짐이 무척이나 가슴 아픕니다.

시저를 죽인 부루터스가 "내가 시저를 죽인 것은 시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욱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듯이 제가 이 회사를 떠나는 것은 여러분을 더욱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해 주십시오.

그동안 OO본부장으로서 여러분이 힘들고 아파할 때 어루만져주고 함께 울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의 진심과는 다르게 여러분의 아픔을 지나친 기억이 있었다면 오늘로 용서해 주시고 떠나가는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저는 비록 회사를 떠나지만 마음은 늘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못다 한 정은 회사를 떠나서라도 두고두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으로 자신이 선택되었음을 은유적으로 풍자하기 위해서 부루터스의 일화를 넣어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