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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상처로 숨쉬는 법(김진영) - 4강. 사랑이라는 영역

by 굼벵이(조용욱)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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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사랑이라는 영역
니체는 이런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독사의 황금빛 뱃가죽을 본 사람은 생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그 후에는 모든것에 예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삶에 대해 거대한 긍정을 하게 될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니체가 봤던 황금빛 뱃가죽은 결국 한 순간일 뿐이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이 황금빛 뱃가죽 같은 가상이다
결국 그 황금빛 뱃가죽에 취하다 보면 독사에게 물린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은 황금빛 뱃가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객관적 권력의 추악함이라고 얘기할 때 공부의 즐거움은 공부의 괴로움으로 바뀔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슬픈 학문이라 말하죠
​프로이트식으로 얘기하면 욕망을 억압하면 그 욕망이 사라지는것이 아니라 반드시 왜곡된 방식으로 되돌아와요
이게 반복 강박이에요
​희생은 근본적으로 보상을 원해요
​우리 사회에는 두가지 객관적 권력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권력이에요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게임 원칙이죠
이 근본적인 모순이 객관적 권력으로 작동하고 또 하나 객관적 권력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선정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이 선정주의는 효라는 개념과 만납니다
권력을 공고히 할수록 효가 강조되는것을 아실 거예요
​충효는 근본적으로 복종이고 순응입니다
​충을 강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일수록 효 즉 핏줄을 강요해요
저는 이것을 선정 주의라고 부릅니다
​핏줄을 건드리는 것은 우리의 속살을 건드리는 거예요
성감대를 건드린다고 볼 수 있어요
가장 내밀한 부분, 가장 보호 되어야 하는 부분 이것들을 공공화 시키죠
공공화시킨다는 건 뭡니까
옷 벗기기와 똑같은 거예요
우리의 입장을 끊임없이 휘저으려하는 것, 정이라는 건 굉장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며 언제나 숨겨져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끊임없이 휘저으려고 그래요
그것이 선정주의 아닙니까
성폭력이에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마음대로 헤치고 들어와서 우리의 은밀한 부분들을 마음대로 주물럭 거리려는 것과 똑같다는 거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모든 권력은 선정주의와 맺어질 때 야한 권력이 된다고 봐요
권력의 대상들을 나체로 보려 한다는 거죠
​이 선정주의가 동원 되면 객관적 권력이 객관적 권력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객관적 권력이 선정주의를 통해서 인간의 내밀한 정이라는 감정의 소통을 정치화 하고 그것을 은폐의 도구로 사용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칸트의 미학 이론에서 무목적적 목적성이라는 말이 나와요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것이면서 또한 가장 구체적인 경험을 가져다 주는 것이죠
칸트는 이것을 무목적적 목적성이라 얘기합니다
우리의 분류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미적 체험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미적 체험이 혼돈 상태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혼돈 상태일 뿐이라면 아름다움의 체험이 일어나지 않아요
감동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이 미적 체험 안에는 다른 로직의 목적성이 있다고 얘기입니다
이것을 아도르노는 사실 사랑의 영역이라고 불러요
이것이 무목적적 목적성이고 쇼펜하우어식으로 얘기하면 음악적 감동의 영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수족관을 수족관으로 생각하지 않죠
태평양으로 생각하죠
그리스인들이 수족관에서 본 것은 태평양입니다
​이것이 가상이죠
니체는 그 가상을 한번 본사람은 삶에 대해서 거대하고 위대한 긍정을 하게 된다고 얘기해요
아도르노 같으면 그 가상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얘기 하겠죠
​리버럴리즘은 바로 이 나와 타자의 다름 차이에서 출발합니다
이 관계는 결코 좁혀질 수 없습니다
이 전제에서 열리게 된 삶의 영역 관계의 영역이 리버럴리즘이에요
​리버럴 리즘의 시대가 오면서 개체들이 개체의 권위를 즐기게 되며 차이가 생기고 차이가 생기면서 또한 사이가 생겨요
너와 나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헤어짐의 공간이에요
개인의 발생은 한편으론 커다란 발견이지만 동시에 이상적 관계가 상실 되는 것이기도 해요
나라고 하는 자유를 얻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무언가의 상실이거든요
이 사회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회는 자꾸 이어지려 해요
이어지려고 하는 욕망이 무엇이냐
이것을 아도르노 미메시스적 인폴더라고 얘기합니다
미메시스는 자꾸 가까워지려는 충동이예요
​합리적 관계는 자꾸 서로를 떨어뜨리려 하는 거죠
아도르노는 미메시스를 타자 동일성의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나와 타자를 똑같이 만들려 하고 그쪽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 더 나아가면 용해 판타지예요
내가 없어지고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과 섞여 버리고 싶은 관능의 영역이죠
​좁혀질 수 없는 사이 그러나 끊임없이 좁혀지려고 하는 이 운동의 간극을 미메시스적 공간이라고 합니다
​아도르노는 이 유통 공간이 개인이 개인과 교류하는 미메시스적 공간과 일치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이 공간을 사실 에로스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에로스의 영역은 은밀한 영역, 숨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영역 공공화가 될 수 없는 영역이에요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영역이죠
​이 은밀함의 영역은 무목적적 목적성의 영역이에요
근본적으로 보면 왜 자꾸 가까워지려는지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건 가까워지려 한다는 목적성이 있습니다
​칸트는 사유는 직선적이고 사선으로 가는 건 전부 왜곡된 사유라 그래요
제가 낙엽이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칸트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제자리로 딱 간단 말이에요
​목적이 없으면 배회를 하는데 결국 어떤 상태에 이르면 바로 여기가 내가 오려했던 곳이다 알게 된다 말이죠
​헤어진 것들이 끊임없이 가까워지려는 운동 이것을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적 영역이라고 불렀어요
​투쟁도 없고 그 어떤 딱딱함도 없고 자의식도 없는 오로지 부드러움의 교류만이 있는것을 아도르노는 유토피아라고 얘기해요
​숙주 없이는 기생충의 권력이 생길 수 없습니다
기생충은 겉보기엔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아무 힘도 없어요
​그것은 숙주에 기생 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어요
​아무리 권력화 된 부드러움이 나에게 목소리를 전해도 우리는 그 목소리를 또 다른 부드러움으로 덮어 버립니다
이게 사랑의 방법론이에요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