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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상처로 숨쉬는 법(김진영) - 5강. 슬픈 선행

by 굼벵이(조용욱)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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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슬픈 선행
​누군가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선행도 하면서 고고하게 살려 한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편하려고 하는 거죠
마음이 편하거든요
​정직함과 성실함이 어떻게 지켜질수 있을까를 물어보면 그건 근본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능력 때문이에요
자기통제 자기관리의 능력이죠
​침착함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걸까요
​무관심에서 와요
당연히 흥분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 할 수 있느냐죠
평생 침착하고 흥분하지 않는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뭐라 그래요
법 없이도 산다고 얘기 하지 않습니까?
​소시민적 차가움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고고한 삶의 원칙을 보면 사실 이 관대함은 어디서 오느냐
증오에서 온다고 얘기합니다
즉 정당한 분배 과정 정당한 생산 관계 정당한 세상을 주장하고 따지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에서 온다는 거죠
​부르주아들은 대단히 관대하지만 이것은 알고 보면 올바른 삶 올바른 사람 올바른 세상에 대해서 증오를 가지기때문에 생기는 관대함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르주아들은 서로에게 후하다
가난 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해요
자기 확인이 되니까요
​부르주아 계급은 가시가 없는가
제가 볼때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그 가시가 안 보일 뿐 안으로 돋아 있습니다
후한 미소 같지만 사실은 안에 있는 가시들이 교환 되고 있다는 거예요
부르주아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을 거쳐야만 가능 하니까요
자기 앞에 있는 경쟁자들에게 가시를 세우고 가시의 힘으로 그들을 넘어설 때만 부르주아 계급이 되는 거죠
​멘토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한 편으로는 나르시시스트에요
​이들은 착한 사람들이고 나르시시스트들이고 영웅주의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상처의 본질, 상처의 이유에 대해서는 둔감하면서 오직 아픔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되면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감정이 소비로 변할 수밖에 없어요
눈물과 정으로 가득찬 감정의 소비 소비주의자가 됩니다
​모든 소비가 타자가 아닌 자기를 위한 것이라 한다면 결국 이 치유하는 사람들 또한 나르시시스트이에요
​결국은 상처를 외면하는 사람들이죠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루고자 하는 잘못된 리버럴리스트인거죠.
​모두 사회에서 생산된 자아들이라는 거죠
세상이 만들어낸 자아들이에요
타율적 자아인 거죠
멘토든 치유주의자든 모두 객관적 권력을 육화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얘기예요
​지식인이 억압 받는 계급과 자기를 동일시 하는 것 즉 거리를 없애려는 것은 과대망상이라는 얘기에요
하나가 되려 하는 것 자체가 우월감의 표현이라는 거죠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없는것이 있습니다
자기 우월감이에요
​상황이 그렇게 만들죠
그런 내면세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고 아도르노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비판적 지식인들은 영웅주의자들이고 무의식적인 우월 주의자들이고 지적 차가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다른 방식으로 비판 행위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은거죠
​고독속에 칩거 해요
그 고독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회는 우리를 전부 고독한 개인으로 만들도록 작동 되고 있어요
살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를 적대관계로 바꿀 수밖에 없어요
적대 관계로 바꾸게 되면 인간관계가 맺어 질 수 없죠
그러니까 다들 단자가 되요
사실 인간은 에로스가 없으면 못 사는 겁니다
서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돼요
​결국 은거는 강요된 고독이에요.
은거주의자들은
난 쟤들하고는 달라
쟤들처럼 어리석은 짓은 안 하겠어
고독의 세계로 들어갈 거야
이렇게 얘기 하지만 이것은 사실 강요된 고독이라는 거예요
동시에 이것은 실천적 지식인들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오는 태도죠
이 우월감이 사실은 강요당해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고독을 귀족화 해요
알게 모르게 이 은거주의자들은 자신이 홀로 있음을 귀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결국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실천 주의적이든 은거 주의적이든 멘토이든 치유주의자이든 모두가 걸려 드는 구조 주의적 덫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는 예외 의식이죠
나는 다르다는 의식은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거고 이 우월감이 작동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따뜻함이 될 수 없어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차가움이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적 이해나 지식이 전체를 얘기할 수 있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이 있어요
​지식인이 진정으로 전체에 대한 통찰을 하고자 하면 먼저 자신의 파편성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기성찰을 또 한번 해야 된다는 거죠
이럴 때만 현대사회 속에서의 지식인은 그들이 해야만 하는 진정한 책임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어 낼 수 있어요
그런데 파편적 이해만으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발만 가능하지 전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통찰 할 수 없어요
또한 이러한 파편적 고발 행위는 오히려 이 시스템을 착각하게 만들어요
​연대 하고 싸우면 이길 수 있는것처럼 착각을 불러 일으킨 다는 거죠
이 착각이 시스템 자체를 더욱 공고히 합니다
​자기성찰은 어디에서 오느냐 수치심에서 오죠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자기가 얼마나 자기와 타협하고, 이기적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차가움을 가동하고 있으며, 얼마나 약자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질식하는 데 자기는 숨쉬고 있다
이 숨쉬는 게 부끄럽다
이 수치심이 곧 고통이죠
이 고통이 고통의 본질을 묻게 만들고 고발 행위를 멈추고 통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임무를 깨워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겸손한 지식인이 태어난 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조건입니다
​철학은 있는 개념을 사용하고, 없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개념들의 관계를 수정하는 작업이기도 해요
있었던 개념들을 현재 상태와 비교해서 개념을 수정하기도 하고, 개념 관계를 다르게 만들기도 하고, 그걸 통해서 새로운 개념을 얻어 내기도 하고, 아니면 이전에 지나 갔다고 하는 개념들을 끄집어내기도 하는 것이 사유예요
​세상의 진실을 얘기 하려는 지식인은 결코 예쁠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은 어떤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을까요
세상을 닮은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추한 세상을 닮는거죠.
​아름다운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객관적 권력이 사랑을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의심이 결국 추한 것들을 지향 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추하게 변해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