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15(수)
노사협의회가 10시부터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처장은 아침부터 신경질을 내며 답변자료 준비가 부실함을 탓해댔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면 술을 깨기 위해서도 회의랍시고 직원들 불러모아 달달 볶으며 사달을 벌이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어제도 대만전력 연수단을 보내 놓고 인력개발팀과 쫑파티를 한다며 술을 퍼마신 모양이다.
아침까지 술이 안 깬 상태에서 계속 생트집과 시비를 일삼았다.
그럴 것 같았으면 전날에 서류를 좀 더 세밀하게 보고 보강을 지시하던가 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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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미 정해진 시간이어서 그냥 회의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보기 싫은 얼굴이지만 노조 P가 내게 와서는 반갑게 악수를 청하길래 그나마 그의 생각이 조금 바뀐 줄 알았다.
내게 정치가 운운하며 비아냥거렸던 사람인데 나보다 더 능글거리며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회의장에서 결국 그의 속내를 드러냈다.
내 책상 유리를 깨부수고 살기등등하게 내 머리를 펀치로 후려치려 했던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지나간다.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서 끝까지 나를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원인이 있을 거고 오해든 곡해든 내게그 원인이 있을 것이니 형님으로서 큰마음을 가지고 달래줄 의무도 내게 있다.
그는 육아휴직과 관련하여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직무유기로 담당자를 문책해 줄 것을 회사에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자기의 주장을 기록에 남길 것을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직무유기로 나를 문책하라며 정면으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정말 놀랐다.
나보다 전무님이 더욱 놀란 표정이었다.
전무님은 이어서 담당자의 범위에 자기 자신까지 포함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처장은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나를 겨냥해서 비수를 꽂았는데 모두들 자기가 대신 맞겠다며 나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육아휴직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관련 법령에 명백히 정해졌거나 판례로 구체화 된 것은 없지만 노동부의 기본 입장이 확고한 면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괜찮겠다는 의견을 처장에게 전했다.
처장은 이와같은 사태에 대한 사전준비가 부족함에 대하여 영 못마땅해 했다.
나도 사실 이 사항에 대하여는 조금 소홀했다.
KT과장에게도 조금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했어야 했는데 소홀했으니 같이 반성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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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협의회가 끝나고 노사협의회 위원들끼리 점심식사를 같이 하다가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처장은 나를 찾았다.
KS과장과 JS과장이 내게 전화를 했다.
부지런히 일식집 “아스코”로 가니 처장과 YJ노무처장, OEJ, KJW, K노무실장, 그리고 노무처 과장들이 어우러져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모두들 혀가 꼬부라지며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보아 술이 이미 도를 넘어섰다.
이사람 저사람 모두 나를 붙잡고 내게 술을 권해왔다.
노무처장은 나를 좋아한다며 집사람이나 딸아이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모님과 아이가 나랑 테니스를 치면서 같이 논 기억이 좋았던 모양이다.
OEJ도 KJW도 나를 좋아한다며 계속 술을 권해왔다.
처장은 이미 도를 넘어서서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는 화장실에 가서는 꾸역꾸역 똥물까지 되돌리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 밖에서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러고도 처장은 또 술을 마신다.
그걸 보는 내가 겁이 덜컥 났다.
그 정도면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심한 중독 징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OEJ이 집사람에게 전화를 하자 자기도 전화를 해서는 부인을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술이 만취된 상태에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얼른 그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처장은 중국 연수단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장소를 기억해 내고는 KR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거기를 예약하라고 했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30층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전망이 그럴 듯하다.
거기서 샴페인을 곁들여 저녁식사를 했다.
사모님 외에도 OOO실 L실장과 MK, PJ이도 함께 자리를 했으므로 거의 열명에 이르렀다.
술 한 잔 더하고 가겠다며 OEJ이 처장을 데리고 호텔 로비에 있는 바(Bar)로 안내하였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피곤이 심하게 몰려왔으므로 나와 KC부장은 KR부장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그냥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이들 영어단어 외우기에 대한 테스트를 애 엄마에게 맡기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매일 저녁 이런 술자리를 계속 이어가다 결국 그는 병을 얻지 않았나 싶다.
어릴 때부터 지기 싫어했으니 토하면서까지 독하게 술마셨고 독하게 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을 게다.
그러면 뭐하나.
정년도 못넘기고 한을 품은 채 고된 삶을 마쳐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자신의 분신인양 그렇게 칭찬과 구박을 이어갔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승진이나 욕구충족을 위한 사다리로 그를 이용했던 듯하다.
나는 그보다 덜 독해서 그가 질주했던 길을 아주 천천히 걸으며 구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퇴직 후엔 머리 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는 하찮은 일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간 그의 불꽃같은 삶이 때론 아름다워 보인다.
오늘도 천국에서 술한잔 하며 나를 찾는 듯하다.
난 좀 천천히 마시다가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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