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25(일)
호신이 담임 PYM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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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계시지요?
한동안 인사 여쭙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어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하고 쑥스런 마음에 몇 번씩 메일을 썼다가 지우곤 했습니다.(주로 제 가슴 속에서 그랬지요)
방학 시작하기 전에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냥 가슴에 묻고 말았네요.
전 예나 지금이나 남자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는데 여자 친구들과는 잘 안 되더군요.
지나치게 수줍음도 많이 타고 신경이 예민해져 평상시에는 유머가 풍부하다가도 여자 앞에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런 행태는 변함이 없더군요.
하지만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는 선생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늘 함께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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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라 여유가 있어 좋으시겠어요.
너무 많은 눈이 내려 여기 저기 많은 피해를 가져왔지만 하얀 눈을 바라다보는 것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눈은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구요.
전에 시골집에서 도사견을 키웠었어요.
덩치는 나보다 크지만 마음은 눈꽃 같은 그런 개였어요.
우리 집 뒤에는 선산이 있었는데 그 뒷동산에 펼쳐진 설원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큰누나가 나은 조카들이 유치원생 쯤 되었을 때인 것 같군요.
그 아이들과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을 무릎까지 빠지면서 동산을 뛰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대학 1학년이나 2학년 때인 것 같아요.
지금은 하늘나라로 간 ‘린티’라는 이름을 가진 도사견하고 한데 어울려 눈꽃동산을 ‘나’와 ‘아이’와 ‘개’가 하나 되어 한껏 즐거움을 만끽하던 아름다운 시절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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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집사람과 심한 말다툼을 했어요.
제가 지난 일요일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메가스터디 학원에 등록을 시키고 왔거든요.
호신이는 월수금에 6:00~10:00까지 하는 국영수 종합반이 있어서 68만원(10주 완성)을 주고 등록을 마쳤고 경신이는 일주일에 3시간 하는 단과반 국, 영, 수 세과목을 등록했는데 과목별로 선생님마다 금액이 다르더군요.
경신이에게 학과목과 선생님 선택권을 주면서 아빠가 돈이 없으니 3과목 정도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냥 국영수만 하겠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 녀석들 공부하는 품새로 보아 3과목도 제대로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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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집사람과 싸운 가장 큰 이유는 집사람이 나의 결정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가지고 있고 그 불만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집사람은 아이들이 집에서 공부를 안 하니 하루 온종일 붙잡아 놓고 가르치는 학원에라도 보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본인이 공부할 의사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고 그래서 공부습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도 강합니다.
거기다가 그런 종류의 학원은 지나치게 많은 학원비를 요구해 제가 두 녀석을 감당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은 나의 결정에 부정적인 태도였고 그러한 태도는 아이들 앞에서도 계속 부정적인 발언이 이어져 아이들마저 나의 결정에 부정적인 자세로 나오기에 나의 분노가 폭발해서 아침 출근길에 한바탕 소란을 피웠습니다.
제가 받는 봉급은 뻔하고 그 봉급에 맞추어 과욕을 부릴 수는 없는 문제여서 130만원이나 지불하고 학원에 등록시켰는데 아이들이 돈 아까운줄 모르고 툴툴거리는 모습이 나의 강한 분노를 자극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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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에 가슴이 답답해 교대 교정에서 욕설을 배앝아 허공에 묻었는데 그래도 머리 속이 가라앉지 않아 회사에서 선배를 찾아가 상담을 나누었습니다.
이 땅의 건전한 상식인(Layman)으로 살아가는 소박한 꿈을 가진 남정네에게 지나친 아픔이다 싶어 이제껏 참아온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던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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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체에서 인사를 담당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의 고충도 들어야 하고 주변의 정서나 동향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고 많은 날 술을 마셔야 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보인 모습이 아마도 아이들의 습관을 잘못 형성하게 하지나 않았나 하는 자책감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만일 나의 그런 행동이 잘못 modelling되었다면 저는 두 배, 세 배 아이들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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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니 정말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나름대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그동안의 잘못을 사죄하는 심정으로 노력한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기말고사 성적표를 들고 온 호신이는 쿠사리 덜 먹었고 저는 좀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그 아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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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이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러다가도 잘 되겠지’ 하는 믿음, ‘우리아이는 잘 될 거야’하는 믿음, 그게 설령 허황되다 하더라도 믿다 보면 현실로 다가설 것이라는 믿음이 아이를 올바르게 키워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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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얼굴도 못 뵌 선생님이지만 선생님이 제게 주신 감명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아 고개 숙여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변변치 못하지만 기회가 되면 식사라도 한번 모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글을 줄일까 합니다.
P/S
너무 길었나요?
죄송합니다.
그 정도는 해야 도리라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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