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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까마귀 클럽(이원석)

by 굼벵이(조용욱) 202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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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광고카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저씨, 아저씨 나이쯤 되면 인생을 알게 될까요?"
"아니... 피로를... 알게 돼...."
젊은이는 모르니까 끝없이 새롭게 방황하고 좌절한다.
그러면서 삶에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그 피로를 해소한다는 이유로 여행을 하지만 여행은 또다른 피로를 더할 뿐이다. 
피로를 계속 이어가다 결국 소진한다.
피로의 끝에 만난 소진은 더이상의 새로운 시도를 멈춘 채  자진하거나 완전히 다른 생으로 변신한다.
일테면 머리를 깎고 입산하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덩달이 여행'을 떠난다. 
남이 가니까 안가면 뒤지는 듯해서 간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 아니다.
단순히 유희가 목적인 여행도 사실 여행이 아니다.
집 떠나면 뭐든 생소하고, 불안하고, 불편해 개고생만 하기에 유희란 목적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소는 '여행의 궁극적 목표는 끝을 경험해 보는 것이고 여행은 작은 종결이나 작은 죽음을 삶에 선사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군대생활도 일종의 여행이다. 
제주 한달 살이도, 필리핀 3년 살이도 모두 여행이다.
여행은 반복되는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경험하고 새롭게 재탄생하기 위해 떠나는 거다.
즉 피로의 끝에서 소진해 없어지지 않기 위해 가는 거다.
이 단편집에서는 각 단편마다 여행을 주제어로 담고 있고 여행의 끝은 많은 경우 죽음이나 이별로 귀결된다.

죽음은 소진되어 없어지는 것이고 이별은 새로운 나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원석 작가는 서른도 안된 94년 생이고 2022년에 이 소설집을 출간했다.
내 막내아들보다도 훨씬 어리다.
씨발씨발 하며 자신의 욕망이나 생각과 부딪치는 세상에 욕을 퍼부어댈 나이다.
즉 새로운 시도와 좌절들로 피로가 쌓이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런 그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토해내는 이야기를 우리 세대가 귀 기울여 경청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우리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냥 '내나이 돼봐라....피로를 알게 돼...' 하기엔 너무 무책임하다.
질풍노도도, 피로도, 소진도, 새로운 시작도 모두 삶이니 그냥 바다처럼 받아들일 일이다.

그런 것들이 버무려져 하나의 커다란 '성장'이 될테니까.
요즘 젊은이들 글을 읽다보면 대화방식이 우리네와 많은 차이를 느낀다.
숙고의 과정이나 상대방에 대한 심도있는 배려를 위해 머뭇거리기 보다는 시니컬하게 하고싶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사회가 그만큼 자기중심적으로 각박해져 가고있다는 증거다.
이 소설집의 끝에 문학평론가 이소의 글이 해설로 들어있어 몇문장 발췌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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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궁극적 목표는 끝을 경험해 보는 것이고 여행은 작은 종결이나 작은 죽음을 삶에 선사한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해 보겠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하겠노라고 답하는것은 무언가를 삶에 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죽음에 더하려는 시도에 가까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잘 살려고 여행을 떠나는것이 아니라 잘 죽으려고 떠나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자들을 향해 소진된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피로한 인간이 더이상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는 단지 시련을 소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해 버렸다
그러니까 소진된자는 피로한 자를 넘어선 상태로 존재한다.
만약 현실에서의 정치가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을 파악하고 그것에 우선순위를 매겨 실현해 가는 일이라면 소진된 자는 결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역설 하나가 탄생한다
피로한 자가 되찾으려 하는 것이 원래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가능성의 영역이라면 소진된자에게 그러한 기존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부패라는 현상이 소멸과 생성에 겹쳐 존재하는 상태인것처럼 소진된자는 비존재로 소멸할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전과 같은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소진된다는것은 매우 양가적인 경계다
삶은 소진된 자의 손에서 모래알처럼 속수무책 빠져나갈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탈바꿈 할수도 있다
들뢰즈는 말한다 
피로한 자가 휴식을 취하려고 눕는 것과 달리 소진 된자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반복하고 있다고
도대체 더이상 지킬 것도 없는 자가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들뢰즈에 의하면 하나의 가능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반해 소진된 자는 배제하는 대신 끊임없이 가능한 것을 소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