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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11

20110703 어느 우울한 직장인의 슬픈 내면 바라보기

by 굼벵이(조용욱) 2025. 3. 29.

7.3()

지난 금요일은 사창립 기념일 이어서 쉬는 날이지만 속초에서 전략회의가 있어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 했다.

처장도 전무도 모두 내가 함께 가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같이 가기로 한 거다.

사흘 연휴인데 사장이 심술 맞게 여기 속초에서 이틀을 까먹도록 날짜를  잡아버렸다.

사업소장들을 태운 버스와 본사 처실장들을 태운 버스가 나뉘어져 있는데 나는 사업소장들이 탄 버스에 올랐다.

진행요원 누군가가 나를 몰라보고 처음부터 거기로 안내했고 이내 잘 못 안내했음을 알고 다른 안내요원이 본사 처실장들이 탄 차로 바꾸어 탈 것을 주문했지만 난 그냥 그 차에 앉아 갔다.

내가 그리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업소장들이 탄 작은 차가 오히려 편하겠단 생각도 일조했다.

 

전략회의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별 대단한 전략도, 눈에 띄는 아이디어도  없는 회의였다.

하지만 내가 주관하는 필드매니저의 발표 내용이나 전략회의에서의 중요도는 그 무엇에 앞섰다. 

그게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싶다.

우리 것을 제외한 그 어떤 분야의 발표내용도 사장을 즐겁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필드매니저의 소감발표는 사장의 코드와 정확히 일치했다.

사장을 가장 기분 좋게 하는 그날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사장은 그자리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을 홍보실장에게 지시했다.

사장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도 우리 필드매니저들을 헤드테이블에 앉히게 하라고 즉석에서 주문했다.

행사를 잘 마무리했기에 정윤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몇 가지 필요한 사항을 지시를 하고 그냥 집으로 내려가려는데 발표를 했던 장희수 부장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해 왔다.

인사처장이나 기획처장도 모두 그냥 가지 말고 같이 식사하며 끝까지  같이 있어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힘들게 섭외해 오늘의 발표를 최고로 마무리한 장부장의 부탁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술을 꽤나 많이 마신 것 같다.

장주옥 전무를 자신의 방에 데려다 주고 인사처장과도 헤어졌다.

장전무는 술 한 잔 같이 하면서 그동안은 자신이 내게 신세만 졌다며 앞으로는 내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그의 말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는 어떤 경우든 충분히 내게 도움을 주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는 내게 정말 필요한 귀인이다.

객실로 돌아오니 나와 함께 방을 쓰는 룸메이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혼자 마시다가 잠이 와 남기고 그냥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술이 덜 깨 힘들다.

연수원 측에서 우루사와 여명을 준비해 놓았기에 그걸 먹었다.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고 택시가 도착하자 고속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침 7시 반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배가 고파 휴게소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었다.

입이 까끌거리고 맛을 느낄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아침을 때워야 했으므로 꾸역꾸역 입 안에 넣었다.

 

집사람은 잠과 원수가 졌는지 내가 오는 모습을 빼꼼히 내다보고는 곧바로 다시 제방에서 잠자리에 든다.

어제 점심에 먹은 산채나물 중 혹 발정제가 들어있었던 건 아닐까?

저녁에 먹은 자연산 회가 내 몸에 제대로 맞았나?

하여간 자꾸만 리비도가 넘쳐흐른다.

결국 불타오르는 몸을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내 속사정이야 어떻든 집사람은 점심때가 되도록 잠에 빠져있다.

집사람 점심을 기다리다간 허기져 죽을 것 같아 그냥 혼자 라면을 삶아먹었다.

우리집은 늘 이런 식이다.

집사람과 내가 생체리듬이 달라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이다.

나는 전형적인 아침형이고 집사람은 저녁형이다.

집사람이 그러니까 아이들도 똑같이 저녁형이다.

아이들도 주말이면 제 어멈처럼 하루 온종일 자빠져 잔다.

경신이가 오후 두시가 되어서야 겨우 눈비비고 일어나 샤워를 한다.

그리곤 세 시 경 즈음에 점심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녀석이 무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공부에 몰입하는 자세는 분명 아니다.

녀석은 그렇게 매일을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이 마지막 방학이고 이 방학이 끝나면 5개월 후 졸업과 더불어 어디론가 독립된 길로 떠나야하는데 불안한 감정 하나 없이 잠만 잘 잔다.

내 대학시절엔 그 즈음엔 불안해 도서관에서 살았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아침밥도 안 먹이고 하루 온종일 잠만 자는 모습을 보여주니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늘 그런 생활이 익숙해져 습관화 되고 생활화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울화통이 치밀지만 참고 혼자 아침 우동에 이어 점심 라면을 또 꾸역꾸역 입 안에 욱여넣는다.

오늘은 일진이 개판인 모양이다.

오늘따라 냉장고에 김치마저 떨어져 김치 없는 라면 맛이 엉망이다.

 

그래도 저녁은 집사람이 차려주었는데 반찬으로 돼지고기 볶음을 내었다.

경신이는 오늘도 다른 반찬은 한 젓갈도 입에 대지 않는다.

오로지 고기만 파먹는다.

편식의 문제점을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언제나 아이들은 극심한 편식에 빠져있고 난 그게 비만을 유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식습관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

3개월간 만이라도 고기 없이 채소로만 식단을 차린다면 아마 습관을 바꾸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제안은 집사람한테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더이상 말하는 내가 불쌍해 아예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뱃속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땡땡하게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곧바로 조각낸 수박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프라스틱 통을  내어 놓는다.

나는 살이 찔까 보아서 두 쪽만 먹고 이내 이를 닦는다.

경신이는 마냥 앉아서 또 꾸역꾸역 수박 먹기를 계속 이어간다.

아이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우이독경이다 보니 나나 아이나 신경이 곤두선다.

거기다가 집사람은 내가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훈계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훈계하는 일도 없고 오히려 비만인 아이에게 더 많이 먹이려 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훈계마저 안하는 것은 아빠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이들이 가진 습관의 대부분은 제 엄마가 가르쳐 놓은 것들이다.

나는 아이들의 식습관, 잠습관, 공부습관 모두가 처음부터 제 어멈이 잘못 길들여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습관도 상당부분 그렇다.

 

아무 말없이 저녁만 얻어먹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집사람은 이제 내 방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또 무언가 뒤틀린 게 있는 모양이다.

나는 부동산 매각대금에 관한 상의를 해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재무 컨설턴트의 권고도 있고 해서 집사람 명의로 1억을 변액연금에 가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사람은 상의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나는 그런 집사람에게 점점 실망하게 되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에도 집사람은 아침을 준비할 생각조차 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다.

내가 아침으로 갱식이 밥국수를 끓였다.

경신이와 집사람을 모두 억지로 일어나게 해 아침밥을 먹였다.

두 사람은 내가 차린 밥을 먹고는 곧바로 다시 잠자리에 든다.

오늘도 예외 없이 점심 넘어 까지 경신이와 집사람이 잠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주말마다 내가 항상 겪는 가장 울화통 터지는 일이다.

 

오늘은 집사람이 감자를 삶아 점심으로 내놓는다.

점심을 먹고 책을 보려니 졸음이 와 잠시 잠자리에 누웠다.

그 때 갑작스레 여권을 회사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곧 일본여행을 가야하는데 지금까지 여권을 챙겨야한다는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험하게 오고 있다.

조금 누그러드는 기색이 보이는 듯해 아파트 지하 차고로 내려갔다.

차 뒷부분 미등 바로 위에서 물이 계속 새어나오면서 내 차를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차가 잠자는 나를 깨웠는지도 모른다.

모처럼 만의 비를 이용해 자신의 몸도 닦고 워밍업도 할 겸해서 나를 깨운 것 아닌가 싶다.

의식은 우리가 모르는 무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의식의 정신세계가 의식세계까지 지배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오늘 아침에 INCOGNITO를 모두 읽었다.

INCOGNITO의 주제가 바로 이런 것들을 다룬다.

사람이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뇌로 본다는 것이다.

온갖 신경계와 각종 화학물질이 어우러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만든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만들어져 의식선상에 띄워놓는다.

딱히 무엇이 무엇을 만든다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복합적인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생각과 감정을 만들고 경험을 저장한다.

 

여권을 챙기기 위해 회사로 가는 중에 어떤 녀석이 갑자기 내 앞으로 끼어들며 차를 몰아붙이는 바람에 정말 많이 놀랐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녀석도 비가 심하게 와서 바로 옆에 있던 내 차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사람은 그래도 저녁엔 된장찌개를 끓이고 파전을 부쳐 찬으로 내어놓았다.

'안주거리로 좋다'고 말한 뒤 소주 반 그라스를 따랐다. (7부능선 쯤 되어 보인다)

이어 경신이에게 또 훈계가 시작되었다.

넌 요즘 뭐하니?”

대답이 없더니 한참 만에

쉬어요 한다.

울화가 치민다.

그냥 매일 먹고 잠자고 쉬면서 살만 찌우는 거야?”

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아무 말이 없다.

이번 방학에 무슨 계획이라도 세웠니?”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어?”하고 묻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요

지난번 읽은 책(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한 가지에 집중하라는 이야기가 핵심 주제였던 것 같은데....”

그게 서로 연관이 돼 있는 것 같아서요

그게 뭔데

자격증도 따야하고 편입도 해야 하고 졸업 작품도 만들어야 하고 학점도 잘 맞아야 하고...”

그런데 그걸 매일 먹고 잠자고 쉬면서 할 수 있겠어?”

“7.15일에 자격증 학원에 나가려구요

학원에 나간다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게 아니잖아. 

지난번에도 넌 계속 학원에 나갔는데 번번이 실패했잖아. 

학원이 공부시키는 게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공부하는 거야

녀석 말대로 모두 각각 독립적인 게 아니다.

그냥 서로 연관되어있다.

자격증을 따면 편입에 유리하고 자격증 공부가 학과공부에 도움도 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실 방학기간 중 바짝 피터지게 공부해서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 놓는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그걸 모르는 듯하다.

이일저일 벌려 놓을 생각 뿐 결실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충고가 아이에게 부담일 수도 있다.

집사람은 나의 이런 충고를 혐오해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오늘 저녁엔 아예 나랑 함께 밥 먹는 것을 거부한다.

싱크대 앞 코딱지 만한 티브이 앞에 서서 혼자 밥을 먹는다.

나랑 앉아서 함께 먹기가 싫다는 걸 나는 느낌으로 안다.

덕분에 오늘 저녁 기분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분노가 이글거리면서 식탁위에 놓여 있던 파카 크리스탈 ON THE ROCKS 잔을 집어 던지고픈 감정이 폭발 일보직전까지 치밀어올랐다.

잔이 벽에 부딪치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그런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인상을 찡그리고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자 그런 내 맘을 읽었는지 집사람이 얼른 수박을 식탁 앞에 놓는다.

나는 그걸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도 집사람을 생각해서 어제 처럼 얼른 두 쪽만 먹고 일어섰다.

 

내일 일본으로 연수 떠날 짐을 쌌다.

짐이랄 것도 없다.

그냥 바지 하나. 티셔츠 하나, 양말, 런닝, 팬티 2벌씩이 끝이다.

이런 나의 감정들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글로 남기고 싶어 지금 컴 앞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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