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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용욱이의 내면세계)/2003

20030419 술의 노예

by 굼벵이(조용욱) 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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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4. 19()

오늘 오전까지 파견자 108명이 전적을 신청했다.

전적 발령 후 점심시간에 파견자 대부 K처장님 방엘 갔다.

사실 지난 목요일에 저녁식사 예약이 되어 있었으나 K처장이 노조와의 저녁 약속 때문에 오늘 점심으로 하자고 하셔서 스케줄을 바꾼 것이다.

K처장님은 총무팀장 C와 총무과장 S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일식집 미도에서 정식을 먹으며 그는 '이 자리가 나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했다.

저녁식사는 나중에 따로 하자는 주문도 덧붙였다.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는 그가 무척 부담스럽다.

K처장님은 인사제도부장 시절 나를 유별나게 아끼셨던 분이다.

내가 인사제도부 신출내기 초짜인 데에도 다른 과장들은 마음에 안 찬다며 중요 보고서는 대부분 내게 맡기셨다.

아무리 고참이라도 직원시절 6년 동안 인사운영 업무를 직접 해 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보고서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보고서는 통찰의 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른 고참 과장들은 팽팽 노는데 내겐 언제나 엄청난 로드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김처장은 나만 몰래 불러내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특별한 사랑과 극진한 대우를 해 주었다.

너무 표나게 나를 편애하는 바람에 고참 선배들에게 엄청 미안했었다.

덕분에 유일하게 나만 카나다 토론토로 9주간의 해외교육도 다녀올 수 있었다.

해외사무소에 근무하고 싶다며 내가 필리핀에 가겠다고 하자 펄쩍 뛰시면서 뉴욕사무소면 몰라도 필리핀은 절대 보낼수 없다고 하시는 바람에 나의 새로운 경력확장이 좌절되기도 했다.

운명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오후 2시부터는 정부 경영평가단의 경영실사가 있었다.

인사분야 평가를 담당하는 교수는 젊은 사람인데 이론적인 바탕 지식은 뛰어나지만 현실 감각은 전혀 없는 친구였다.

모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답변해 주었다.

Y가 자꾸 오버하며 평가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불필요한 말들을 지나치게 쏟아내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대체로 수검은 아주 잘 받은 것 같다.

K처장은 기분이 좋아서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과장이상 직원들이 모두 우일관에 모여 소주를 마셨다.

K처장이 한잔 더 하자며 차에 오르는데 Y가 나보고 차에 함께 타란다.

자기는 빠지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KY과장과 나만 K위원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고 K처장은 nox에 가기를 원했지만 문이 닫혀있어 수궁으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수궁은 처음 가보는 집인데 엄청 크고 으리으리해 나를 긴장시켰다.

전통 한식을 주로 제공하지만 일하는 여종업원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면서 즐기는 곳이다.

과거 기생집을 재현한 듯하다.

온돌방 형식의 엄청 큰 방에 앉아 밥과 술을 먹은 뒤 밴드를 불러 써빙 하던 아가씨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도 춘다.

결국 우리는 이미 저녁밥을 먹었음에도 2차에 걸쳐 또 밥과 술을 먹어야 했다.

K처장은 발렌타인 17년산 2병을 시켰고 나중에 한 병이 더 추가되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별로 마신 기억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술이 금세 없어져 버린 것이다.

K처장은 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리에 앉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KY와 KN는 여종업원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나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56년생 아줌마와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다.

술값이 꽤 나왔을 텐데 얼마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K처장이 일체 술값을 계산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nox에서 술을 마실 적에도 발렌타인 30년산을 마시면서 아무도 술값을 못 내게 하더니 이번에도 또 그렇게 한 것이다.

결국 대리기사를 불러 K처장과 KN를 차에 태워 보내고 나는 KY랑 같이 택시를 타고 오다가 wax에서 생맥주 500CC를 한잔 더하고 들어왔다.

김사장은 지난번 남한산성에서 눈이 쌓인 등산로를 오르며 내가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KY에게 되새기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완전히 맛이 가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술을 마시려 한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것만 통제할 수 있다면 술로 인해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탕한 술 경험을 통해 내가 터득한 생존 비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처음 석잔은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마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경우든 10시 넘으면 곧바로 귀가하는 방식이다.

이것도 내가 좌장이 되었을 때에만 실천이 가능한 것이어서 좌장이 될 때 까지는 이렇게 술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