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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찾아서/인문학 산책

상처로 숨쉬는 법(김진영) - 제14강. 사랑의 도덕

by 굼벵이(조용욱) 202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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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강 사랑의 도덕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번 다시 되찾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일단 소유를 하고 나면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더는 내 눈을 사로 잡지 못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뭔가를 소유 하려면 먼저 물화시켜야 해요 물질적인 것으로 만들어야지만 소유가 돼요
​사랑은 프로이드식으로 얘기하면 일종의 리비도 운동이죠
리비도 운동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타자간의 관계죠
이 관계 맺기라는 것이 리비도의 성격이에요
말하자면 리비도는 내 안에 있지만 항상 다른 곳으로 이동 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단순한 육욕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 에너지, 더 드라이브, 트립인데요
이렇게 이동해 나가는 것이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거죠
내 리비도가 어딘가로 옮겨 갔다가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 한다는 것이죠 
머물렀던 것은 언젠가는 낡은것이 되어 버려요
결국 리비도란 뭐냐
새것에의 욕망이에요
그렇게 보면 사랑이란 무엇이죠
새로운 것을 찾아 나가는 것이죠
이것이 사랑과 리비도의 얼굴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존재로서 발견되는 거예요
연애는 다른 게 아니라 발견하는 거잖아요
​사실 리비도는 끊임없이 움직여 나가는 무엇이기 때문에 리비도를 가진 개인은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과 소유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데 딜레마가 있습니다
'당신이 나의 애인이야' 라는 것은 공적 관계가 아니라 사유 관계예요
우리는 그것을 연애의 내밀성이라고 해요
한마디로 서로의 사유재산이 되는 것이죠
​문제는 모든것이 물화되고 소유되면 노화 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시간에 마모 될 수밖에 없거든요
우리가 연애를 할수록 서로에게 시큰둥 해지고 옛날 같지 않다고 서로 탓하고 이런 것도 다 노화 현상이에요
그래서 연애를 하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딜레마에 빠지는 거죠
내 사랑의 에너지가 연애의 전제인데 이사랑의 에너지는 말씀 드렸듯이 끊임없이 새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노화 된다는 거죠
리비도와 시간의 문제로 보면 피할 수 없는 연애의 딜레마 때문이에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새로움으로 나아 가려는 내 연인의 리비도를 자기와 관계 맺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연애의 근원적인 두려움이에요
사랑은 근본적으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두개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관용입니다
사랑의 근본적 딜레마 때문에 믿음을 배반할 수밖에 없고 믿음을 환멸로 바꿀 수밖에 없다는것을 두려움과 관용은 승인 하는 거예요
​연애의 결과 궁극적으로 남는 것 미움이나 애착이 아닌 허망함 허망함이 가져다 주는 열패감 그 어떤 부끄러움입니다
이 부끄러움 덕분에 사실 성숙해 지기도 합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나 자신의 열정을 대하는 태도가 한단계 성숙해 나갑니다
그래서 시련은 아주 좋은 스승입니다
​사랑의 도덕이란 뭘까요
사랑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고 환멸의 구조로부터 구출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랑일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죠
​자연적 시간의 구조가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상품, 시간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품 관계를 보면 상품이 나를 매혹할 때는 늘 새 것이에요
새것으로 받아들인 상품은 물화 되는 것이고 나의 소유 대상입니다
그러나 상품은 바로 그 소유와 물화성 때문에 점점 낡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죠
그 상품을 다시 새것으로 바꾸죠
이것이 다름 아닌 시장 원칙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가장 문명화 된 영역인데 알고보면 철저하게 자연적 시간을 그대로 복제 하고 있어요
자연이 새것을 만들었다가 낡은것이 되게하고 결국 없애 버리는 것과 똑같죠
​사랑의 도덕은 스스로를 리싸이클링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낡아진 것을 다시 새로운 것으로 생성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상품의 시간성이나 자연의 시간성에 항변하는 거예요
새로움에서 낡음으로 흐르는 소멸의 행로가 아니라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흐르는 생성의 행로를 따라가는 것이죠
이것이 아도르노는 사랑의 도덕이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라고 얘기합니다
​리싸이클링 원칙으로 애인을 이해하자면 그 사람은 분명히 낡아 가지만 다시 새로운 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죠
나날이 낡아서 나중에는 폐기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낡아가지만 매번 새롭게 발견되는 사람이에요
​사랑은 원래 새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낡은 것을 버리고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게 옳지 않겠어요
그 사람이 애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뒤돌아 선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애인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애인이니까요
​그사람을 오늘 만나고 내일 만나도 또 새로 만난 것 같으면 사실 새로운 애인을 구할 필요가 없어요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주체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것을 또한 욕망 주체라고 불러요
아도르노에게 사랑의 주체는 사랑의 도덕을 지키는 사람 시장 원칙을 따라서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아도르노는 이 사랑의 주체를 바르트처럼 욕망 주체라고 하는 대신 미메시스적 주체라고 합니다
​미메시스적 주체는 누구냐
타자 동일화 원칙을 지키는 주체이에요
다시 말하면 연애 관계에서 상대방을 나와 똑같이 만들려는 주체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과 동일해 지려고 하는 그런 주체예요
내가 애인과 비슷해지려고 닮아지려고 하는것은 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욕동이죠
그런데 그 사람과 나는 사실 결코 똑같아 질 수 없어요
마지막까지 결코 합일될 수 없는 그 사람과 나의 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이 미메시스라는 개념은 내가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서 합일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가까이 가기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까이 가도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가 줄어지지 않는 건 뭐 때문이죠
두 사람 다 객체이기 때문이죠
그 무엇으로도 합일 될 수 없는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르트의 욕망 주체도 거의 성격이 비슷해요
​욕망의 주체는 대상에게 가서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도저히 소거시킬 수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이 빈 곳에서 욕망이 태어나지요
이 욕망은 끊임없이 빈 곳을 채우려고 투사 되지만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욕망으로 바뀌고 이 바뀐 욕망이 투사 되지만 또한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욕망으로 바뀌는 말하자면 욕망의 체인이 사랑이라고 바르트는 얘기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욕망의 주체가 되는 일이고 그것은 곧 하나의 욕망을 대상에게 투사 해서 그 욕망을 소거 시키는것이 아니라 확대 재생산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도르노의 미메시스적 주체이든 바르트의 욕망 주체이든 이 소유 불가능성이 전제가 되고 그것 때문에 욕망이 살아 움직인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의 육체를 탐색하면 할수록 마치 클론이 태어나는 것 처럼 그 사람이 무한하게 생성 된다는 거예요
탐색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너무 많은 존재들이 되어서도 도저히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죠
​바르트가 얘기 하려는 것은 편집증적 욕망관계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육체를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함이 확인 되면서 다름 아닌 이 불가능성 때문에 그 사람은 확대재생산 된다는 거예요
​또한 그 사람의 육체가 무수한 욕망의 대상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은 정말로 그사람이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욕망 자아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즉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욕망을 지닌 나 자신이 규정 할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에게 욕망을 투사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요
그 사람은 사건이 되죠
예기치 않게 도래하는 무엇이 사건이라면 그 사람은 나에게 매번 사건으로 생성되는 거예요
내가 매번 새롭게 욕망의 주체가 되고 사건이 되며 생성이 되는 자임을 인식할 때 즉 자신의 욕망 주체성과 만났을 때 비로소 연애는 자연의 시간과 시장의 원칙에서 벗어나요
​우리가 결국 그 사람을 낡은 것으로만 생각하고 그 낡음 때문에 내 욕망이 줄어들고 그래서 새로운 교환의 대상을 찾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있는것이 아니에요
시장 질서와 상품 질서에 의해서 나의 욕망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다른식으로 얘기하면 나의 욕망이 시장이 제공하는 새로운 것에만 투사 되고 충동질 되기때문에 결국 그 사람도 나에게 매번 새로운 대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객관적 권력을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권력은 우리의 연애 욕망이나 사랑의 욕망까지 상품 욕망으로 시장의 욕망으로 바꿔내요
이 권력을 통찰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토록 사랑을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 앞에서 열패감을 맛보고 부끄러움 만을 껴안게 된다는 것이죠
​객관적 권력이란 우리에게 사랑의 도덕을 시장의 교환 원칙으로 강요하는 그 어떤 권력이죠
​성공과 노력의 일치를 강요하는 사회는 조숙한 사람의 뛰어남을 용서하지 않는다
​영재의 그 특별한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제가 볼 때 그것은 거짓말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모든 거짓말의 선입견을 빼 버리면 누구나 영재성이 드러날 거예요
​우리가 무의도적이 되면 얼마나 많은것을 느낄 것이며 얼마나 놀라운 지적 통찰이 이루어질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왜곡된 가치 체계 없이 대상과 만난다면 영재성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개인성 만이 중요시 되는 리버럴리즘의 사회 속에서는 자기를 멋지게 보존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개인들이 객관적 권력의 도구가 되고 만다
자기 보존에 실패 하게 된다는것이 아도르노의 근본적인 문제 의식입니다
​저마다 타고난 것들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가치로 전부 수렴 되어 버릴 때 아이들이 둔재로 변하는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뭘 두려워 하는것은 그것에 매혹당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사랑의 관계를 맺는 다는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존재로서 발견되는 거예요 연애는 다른 게 아니라 발견하는 거잖아요
​사실 리비도는 끊임없이 움직여 나가는 무엇이기때문에 리비도를 가진 개인은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과 소유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데 딜레마가 있습니다 당신이 나의 애인이야라는것은 공적 관계가 아니라 사유 관계예요 우리는 그것을 연애의 내밀성이라고 해요 한마디로 서로의 사유재산이 되는 것이죠
​문제는 모든것이 물 화 되고 소유 되면 노화 할수밖에 없어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시간에 마모 될수밖에 없거든요 우리가 연애를 할수록 서로에게 시큰둥 해지고 옛날 같지 않다고 서로 탓하고 이런것도 다 노화 현상이에요 그래서 연애를 하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딜레마에 빠지는 거죠 내 사랑의 에너지가 연애의 전제인데 이사랑의 에너지는 말씀 드렸듯이 끊임없이 새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노화 된다는 거죠 리비도와 시간의 문제로 보면 피할 수 없는 연애의 딜레마 때문이에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새로움으로 나아 가려는 내 연인의 리비도를 자기와 관계 맺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연애의 근원적인 두려움이에요
사랑은 근본적으로 딜레마에 빠질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두개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관용입니다 사랑의 근본적 딜레마때문에 믿음을 배반 할수밖에 없고 믿음을 환멸로 바꿀수밖에 없다는것을 두려움과 관용은 승인 하는 거예요
​연애의 결과 궁극적으로 남는 것 미움이나 애착이 아닌 허망 함 허망 함이 가져다 주는 열 패 감 그 어떤 부끄러움입니다 이 부끄러움 덕분에 사실 성숙해 지기도 합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나 자신의 열정을 대하는 태도가 한단계 성숙해 나갑니다 그래서 시련은 아주 좋은 스승입니다
​사랑의 도덕이란 뭘까요 사랑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고 환멸의 구조로부터 구출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랑일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죠
​자연적 시간의 구조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적 상품 시간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품 관계를 보면 상품이 나를 매혹할때는 늘 새 것이에요 새것으로 받아들인 상품은 물 화 되는 것이고 나의 소유 대상입니다 그러나 상품은 바로 그 소유와 물 화성때문에 점점 낡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죠 그 상품을 다시 새것으로 바꾸죠 이것이 다름 아닌 시장 원칙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가장 문명 화 된 영역인데 알고보면 철저하게 자연적 시간 성을 그대로 복제 하고 있어요 자연이 새것을 만들었다가 낡은것이 되게하고 결국 없애 버리는것과 똑같죠
​사랑의 도덕은 스스로를 리싸이클링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낡아진것을 다시 새로운 것으로 생성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상품의 시간 성이나 자연의 시간 성에 항변 하는 거예요 새로움에서 낡음으로 흐르는 소멸의 행로가 아니라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흐르는 생성의 행로를 따라가는 것이죠 이것이 아도르노는 사랑의 도덕이 걸어가고 자 하는 길이라고 얘기합니다
​리싸이클링 원칙으로 애인을 이해하자면 그 사람은 분명히 낡아 가지만 다시 새로운 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죠 나날이 낡아서 나중에는 폐기 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낡아가지만 매번 새롭게 발견되는 사람이에요
​사랑은 원래 새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낡은것을 버리고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게 옳지 않겠어요 그 사람이 애인이 있다는것을 받아들이고 뒤돌아 선 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애인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애인이니까요
​그사람을 오늘 만나고 내일 만나도 또 새로 만난 것 같으면 사실 새로운 애인을 구할 필요가 없어요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주체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것을 또한 욕망 주체라고 불러요 아도르노에게 사랑의 주체는 사랑의 도덕을 지키는 사람 시장 원칙을 따라서 사랑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아도르노는 이 사랑의 주체를 바르트처럼 욕망 주체라고 하는 대신 미메시스 적 주체라고 합니다
​미메시스 적 주체는 누구냐 타자 동일 화 원칙을 지키는 주체이에요 다시 말하면 연애 관계에서 상대방을 나와 똑같이 만들려는 주체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과 동일 해 지려고 하는 그런 주체예요 내가 애인과 비슷해 지려 고 닮아 지려 고 하는것은 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욕동이죠 그런데 그 사람과 나는 사실 결코 똑같아 질 수 없어요 마지막까지 결코 합일될 수 없는 그 사람과 나의 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이 미 메시 스라는 개념은 내가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서 합일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가까이 가기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까이 가도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가 줄어지지 않는 건 뭐 때문이죠 두 사람 다 객체이기 때문이죠 그 무엇으로도 합일 될 수 없는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르트의 욕망 주체도 거의 성격이 비슷해요
​욕망의 주체는 대상에게 가서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도저히 소거시킬 수 없는 빈 곳이 있기때문에 이 빈 곳에서 욕망이 태어나지요 이 욕망은 끊임없이 빈 곳을 채우려고 투사 되지만 채울수가 없기때문에 다른 욕망으로 바뀌고이 바뀐 욕망이 투사 되지만 또한 채울 수 없기때문에 또 다른 욕망으로 바뀌는 말하자면 욕망의 체인이 사랑이라고 바르트는 얘기합니다
​사랑한다는것은 욕망의 주체가 되는 일이고 그것은 곧 하나의 욕망을 대상에게 투사 해서 그 욕망을 소거 시키는것이 아니라 확대 재 생산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도르노의 미메시스 적 주체이든 바르트의 욕망 주체이든 이 소유 불 가능성이 전제가 되고 그것 때문에 욕망이 살아 움직인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의 육체를 탐색 하면 할수록 마치 클론이 태어나는것처럼 그 사람이 무한 하게 생성 된다는 거예요 탐색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너무 많은 존재들이 되어서도 도저히 누가 누구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죠
​바르트가 얘기 하려는것은 편집증 적 욕망 관계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육체를 소유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 함이 확인 되면서 다름 아닌 이 불 가능성때문에 그 사람은 확대 재생산 된다는 거예요
​또한 그 사람의 육체가 무수한 욕망의 대상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것은 정말로 그사람이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때문이 아니라 내가 욕망 자아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즉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욕망을 지닌 나자신이 규정 할수도 소유할수도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에게 욕망을 투사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요 그 사람은 사건이 되죠 예기치 않게 도래하는 무엇이 사건이라면 그 사람은 나에게 매번 사건으로 생성되는 거예요 내가 매번 새롭게 욕망의 주체가 되고 사건이 되며 생성이 되는 자임을 인식할 때 즉 자신의 욕망 주체성과 만났을 때 비로소 연애는 자연의 시간과 시장의 원칙에서 벗어나요
​우리가 결국 그 사람을 낡은 것으로만 생각하고 그 낡음때문에 내 욕망이 줄어들고 그래서 새로운 교환의 대상을 찾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있는것이 아니에요 시장 질서와 상품 질서에 의해서 나의 욕망을 상실 했기 때문이죠 다른식으로 얘기하면 나의 욕망이 시장이 제공하는 새로운것에만 투사 되고 충동 질 되기때문에 결국 그 사람도 나에게 매번 새로운 대상으로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상품으로다가 오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객관적 권력을 얘기할수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권력은 우리의 연애 욕망이나 사랑의 욕망까지 상품 욕망으로 시장의 욕망으로 바꿔내요 이 권력을 통찰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토록 사랑을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 앞에서 열 패 감을 맛보고 부끄러움 만을 껴안게 된다는 것이죠
​객관적 권력이란 우리에게 사랑의 도덕을 시장의 교환 원칙으로 강요하는 그 어떤 권력이죠
​성공과 노력의 일치를 강요하는 사회는 조숙한 사람의 뛰어남을 용서하지 않는다
​영재의 그 특별한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제가 볼 때 그것은 거짓말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모든 거짓말의 선입견을 빼 버리면 누구나 영재성이 드러날 거예요
​우리가 무 의도적이 되면 얼마나 많은것을 느낄 것이며 얼마나 놀라운 지적 통찰이 이루어질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왜곡 된 가치 체계 없이 대상과 만난다면 영재성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개인성 만이 중요시 되는 리버럴 리즘의 사회 속에서는 자기를 멋지게 보존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기때문에 모든 개인들이 객관적 권력의 도구가 되고 만다 자기 보존에 실패 하게 된다는것이 아도르노의 근본적인 문제 의식입니다
​저마다 타고난 것들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가치로 전부 수렴 되어 버릴 때 아이들이 둔재로 변하는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뭘 두려워 하는것은 그것에 매혹당하기 때문이에요